"이게 서예야? 추상화지."서예가 황석봉(54·사진)씨가 12∼27일 학고재 화랑(02―720―1524)에서 열번째로 여는 개인전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나온 작품들을 보면 누구든 이런 말을 할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씨가 '서예'라고 내놓은 작품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한자나 한글은 단 한 자도 없다. 캔버스나 오동나무판에 먹이나 아크릴 물감을 써서 휘갈겨 놓은 듯한 붓자국, 혹은 의미를 쉽게 알 수 없는 형체를 새긴 칼자국이 있을뿐이다.
그러나 황씨는 이것이 서예라고 우긴다. "보이거나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없다고 서예가 아닌 것이 아니다. 나는 문자 아닌 문자를 쓸 뿐이다." 황씨는 이 작품들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예 하면 떠올리는 문자가 아니라 '마음의 파동'을 전달하려 한다고 말했다. "서예와 회화의 차이는 재료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강조하면서.
철저한 전통 서예와 전각 연구에서 출발한 황씨지만 그의 관심은 늘 서예의 틀 밖에 있었다. 어려운 한문 문장, 창작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모방, 흑백의 단순함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서예를 대중과 멀어지게 한 요인이자 서예가로서 자신이 한계에 부딪친 이유라고 그는 생각했다.
글자를 선과 점으로 응축시키고, 붓 대신 나이프를 들고 컬러 물감을 썼다. 1991년 현대서예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자신의 서예를 '현대 조형 서예'라고 부르고, 예술적 지향을 '기 아트(氣 Art)'라고 표현한다. 전시 제목 '불립문자'처럼 그는 "문자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서예를 한다"고 말한다.
명필 한석봉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자로 쓰고, '시몽(是夢)'이라는 아호를 가진 황씨는 1988년 일곱번째 개인전 때부터 이렇게 문자의 구속에서 벗어난 작업을 보여 왔다.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작업을 하는 그의 행보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어떨까.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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