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대북송금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대와 정부, 북한등 3자간의 치밀한 사전합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또 이 자금은 현대의 독점적 대북사업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패키지 리베이트' 성격이며, 총액수는 5억달러 이상으로 정부(국정원)과 현대가 각각 2억달러와 3억달러씩 조달·송금하기로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산업은행 대출을 통해 확보된 2억달러(2,235억원)는 현대상선 계좌가 아닌 외환은행내 국정원의 비밀계좌에서 송금됐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정부·현대, 대북송금 역할 분담
전체 리베이트 규모는 5억달러가 유력하다.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과 절친했던 경제계 원로는 정 회장의 말을 빌려, "북한은 10억달러를 요구했지만, 박지원(朴智元) 당시 문화관광부장관과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밤샘 조율끝에 5억달러로 합의했다"고 밝혔고,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2000년 6월을 전후한 대북 송금액은 5억달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현대와 국정원이 5억달러 조달·송금을 2대3씩 책임지기로 했다는 주장이 여권내에서 제기됐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9일 "정상회담과 현대 대북사업을 동시에 보장받는 만큼 당시 유동성 위기에 있던 현대가 자체 조달하기 힘들었던 2억달러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맡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북 송금과정에 정통한 정부 고위당국자도 "2000년 3월 베이징에서 박지원 장관이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정몽헌 회장과 함께 송호경(宋浩景)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북한에 모종의 약속을 했다"며 "이후 국정원이 자금 조달·송금에 적극 개입했다"고 말했다. 즉, 박 장관과 정몽헌 회장이 패키지 리베이트 제공 시나리오를 쓰고,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과 현대가 자금 조달·송금을 연출했다는 얘기다.
현대 대북사업 몫은 3억달러?
현대는 사업특성상 국제적인 리베이트 제공 노하우가 많은 현대건설 주도로 총 3억달러를 직접 송금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가 현대건설에 제기한 1억달러 반환청구소장에 따르면 현대전자 미국·일본 법인은 1억달러를 모아 2000년 6월9일 현대건설 런던지사의 영국 계좌로 송금했고, 이 돈은 다시 두바이에 있는 현대건설의 페이퍼컴퍼니(알카파지)로 보내졌다. 현대전자 영국법인은 이후 스코틀랜드공장 매각대금중 1억달러로 미국·일본 법인에 보전해줬다.
또 5∼6월 현대건설 싱가포르지사에서 1억5,000만달러가 북한에 송금된 데 이어, 현대건설이 캐나다 알칸사에 판 대한알루미늄공업 매각대금중 4,800만달러가 북한에 보내졌다는 의혹을 한나라당이 제기하고 있다.
국정원, 2억달러 조달·송금 가능성
국정원이 산업은행에 압력을 넣어 4,000억원을 현대상선에 대출해주고 만기연장을 보장해주는 한편 이중 2,235억원(2억달러)을 외환은행을 통해 직접 송금했다는 의혹도 점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4,000억원 산은 대출의 경우,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가 지난해 국감에서 '청와대 외압'을 제기, 외압 개연성이 높다. 4,000억원 대출은 당시 현대상선으로서는 엄청난 특혜였다. 그러나 외압 루트가 청와대 라인이었는지, 아니면 국정원 라인이었는지는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이와함께 2000년 6월10일 자기앞수표 26장(2,235억원)을 외환은행에 입금(배서)한 6명도 현대상선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감사원 특감결과 확인됐다. 즉, 국정원 직원이거나 국정원 직원이 국민연금 관리공단에도 등록되지 않은 사람의 명의를 도용했을 거라는 얘기다. 더욱이 이날(혹은 월요일인 12일) 2억달러가 송금된 외환은행 계좌가 현대상선이 아닌 국정원의 유령회사 계좌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당시 현대그룹을 담당했던 외환은행 관계자는 "채권단이 예의주시하던 때였기 때문에 현대상선 계좌를 이용했다면 채권단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실제 당시 현대상선을 통해 그만한 거액이 나갔던 흔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감사원도 산업은행에서 6월7일 인출된 수표가 10일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로 돌아왔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이 수표가 현대상선 계좌에 입금됐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해,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 정부, 사업승인 안해
현대측이 북한과 합의했다고 밝힌 7대 대북사업에 대해 정부가 법적으로 승인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9일 확인됨에 따라 북한에 지원된 2,235억원의 성격은 더욱 아리송해졌다. 더욱이 이를 놓고 주무 부처인 통일부와 현대측은 엇갈린 주장을 펴면서 의혹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현대측은 남북교류협력법 절차에 따라 대북사업승인을 요청하고 추진상황을 보고했으나 통일부 측이 신청서를 여러 차례 반려했다고 주장, 양측이 진위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현대가 2000년 8월 정부에 북한과의 경협 총괄합의서만 제출한 채 지금까지 개별 사업에 대해선 전혀 승인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해명은 대북비밀지원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부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국자는 또 "사업 승인 요청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사업 승인도 난 적이 없다"며 "현대측이 제출한 합의서는 사업규모와 일정조차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의향서 수준이었다"고 밝혀 현대측 주장을 일축했다.
현대측은 그러나 "북한과 7대 사업에 대해 합의한 2000년 8월 이후 수차례 정부에 사업승인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사업 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했다"며 "7대 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개성공단 사업에 대해서만 올해 초 겨우 사업승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대측은 특히 "사업 승인 전 돈이 건네진 것은 현행법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며 "그러나 현대가 이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해 정부측과의 협의 하에 대북 송금이 이뤄졌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부시·럼스펠드 잇단 對北 강경발언
미국의 지도부가 잇달아 대북 무력사용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을 해 북한 핵 문제 대응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7일 북한 핵 문제 해법에 대해 "모든 선택방안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 자체는 그가 즐겨 써온 수사적 표현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최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과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북한에 대한 강성 발언을 한 이후 부시 대통령의 이 언급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미 정부가 북한에 대한 무력사용을 비중있게 고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럼스펠드 장관은 7일 이탈리아의 미 공군기지에서 "핵무기를 과격한 국가와 테러집단에 확산시키는 것은 이라크 위기보다 더 큰 문제이며, 북한에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파월 장관은 6일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침공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지만 북한에 대해 무력사용을 포함한 어떤 정책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성 기조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만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해결 기조가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7일 정례 브리핑에서 부시 대통령의 언급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은 행정부의 정책을 계속 주의해 보지 않았던 일부 모르는 사람들의 우려"라고 말했다. 최후 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검토할 수 있다는 원론을 재확인한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당연한 원론을 거듭 밝히는 데는 "북한의 핵 협박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압박성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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