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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국토기행]<18> 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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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국토기행]<18> 논산

입력
2003.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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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2시간30분 남짓, 논산(論山)역이 가까워 오자 백제 때부터의 오랜 역사가 밴 땅임을 알리는 표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비사벌 아파트'가 지나고 '황산 주유소' '왕건 주유소'가 스쳐가더니 '놀뫼 식당'이 나타나면서 열차는 역 구내로 들어가 멈춰 섰다. '놀뫼'는 논산 지역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주민들은 놀뫼라는 지명을 생활 속에서 친근하게 쓰고 있었다. 왜 놀뫼인가. 기행의 끝 무렵 강경(江景) 땅에 이르러서야 그 연유를 알게 됐지만, 논산보다는 놀뫼가 입 안에서 발음할 때부터 한결 정겨운 우리말인 건 분명했다.역사(驛舍)를 빠져 나오면 바로 마주치는 두 가지 풍경이 이곳이 논산임을 알게 한다. '입대 장병 환영'을 내건 이발소 서넛, 그리고 시비(詩碑) '논산역에서' 였다. '그대는 아는가/ 깊은 밤의 행렬을/ 별빛 사이 무운 용병/ 전선으로 떠나던 길목/ 숱한 젊음이 애환을 딛고'로 이어지는 심응섭의 시다.

논산에 육군 제2훈련소가 들어선 건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다. 그때부터 반 세기가 넘게 논산은 적어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장정'들에게는 훈련소의 고장이었다. 최백호나 김민우 혹은 김광석의 노래를 소주잔에 함께 담아 털어넣은 장정들은 애인이나 부모형제와 함께, 또는 홀로 논산역에 내려 머리를 빡빡 깎고 막막한 3년이 기다리는 연무읍의 수용연대로 향했다.

하지만 논산 사람들은 '논산=육군훈련소'라는 등식을 웬만하면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소위 '논산 기질'이 50년 동안 훈련소로 인한 군사적 문화와 전혀 관련 없이 생겨난 게 아닙니다. 인구 17만밖에 안 되는 논산 사람들이 그 몇 배나 되는 충남의 다른 시 지역과 축구 경기를 해도 지는 법이 드물다는 말이 우스개처럼 있지요.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기질이 반 세기 동안 논산의 특징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산에는 그보다 훨씬 뿌리깊은 역사가 다른 어느 곳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류제협(57) 논산문화원 사무국장은 말했다.

"논산은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주요한 역사의 변혁이 이뤄졌던 땅"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백제 계백 장군이 이끈 결사대 5,000명이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사와 싸운 황산벌이 바로 논산 땅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고 개국사찰 개태사를 세운 곳도 이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로 주춧돌까지 놓았던 계룡산 아래 신도안도 논산 땅이다. "하기야 훈련소가 들어선 연무읍은 원래 옛 지명이 구자곡(九子谷)이었습니다. 아들 혹은 남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니, 이곳에 대한민국 장정들이 모여들게 된 게 전혀 우연은 아닌 모양입니다."

지금 논산은 이런 역사에 바탕해 '충절과 예학의 고장'으로 발전 방향을 잡아나가고 있다. "인근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였다면 논산은 그에 그치지 않고 고려, 조선과 근대로 이어지는 보다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다"고 이연형(46) 논산시 문화재담당관은 밝혔다. 신기리 지석묘 등 선사시대 유적은 물론 노성산성 황화산성 등 삼국시대 유적,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유명한 관촉사로 대표되는 고려 불교의 전통, 향교 3곳과 서원 11곳에 남은 유교문화의 전통 등이 그것이다. 기호학파의 태두 김장생과 아들 김집이 이곳에서 학문을 열었고 송시열도 후학을 가르쳤다. 류제협씨는 "'충청도 양반'이란 말은 사실 논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 시로 승격한 후 논산은 단지 너른 평야를 가진 농촌도시, 혹은 군사도시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

관촉사 옆 논산평야에 물길을 대는 커다란 저수지 탑정호를 바라보며 시내를 거쳐 연무읍으로 가 본다. 한촌이었던 이곳은 훈련소가 생기면서 외지인들이 80% 이상 들어 와 음식· 숙박업 등 서비스업이 발달한 신흥 도심이 됐다. 연무대 정문 바로 맞은편에 그야말로 골동품 같은 이발소 '금곡 이용원'이 눈에 띈다. 35년간 한곳에서 일해왔다는 이발사 강석기(72)씨는 "장사 안돼. 요즘은 장정들 웬만하면 논산시내나 연무읍에서 머리 깎고 와.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생긴 뒤로는 특히 더 그래"라고 말했다. 이발소 안 풍경은 우리 기억 속의 60년대 이발소 모습 그대로다.

지난해 완공된 천안―논산 고속도로는 논산의 모습을 또 한번 바꿔놓을 것 같다. 원래 논산은 교통의 요지다. 호남선이 시의 중앙을 관통했고, 이어 호남고속도로가 시를 남북으로 지났다. 동쪽으로 대전, 남쪽으로 전북과 맞닿은 논산의 위치는 수도권과 한반도의 중남부를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다. 일찍이 1731년(조선 영조 7년)에 세워진 '미내다리'는 길이 30m 폭 2.8m에 불과하지만 당시는 한강다리보다 유명했던, 삼남을 연결하는 제1의 다리로 최근 복원됐다. 춘향전에도 이도령이 이 다리를 지나는 대목이 나온다. 어쨌든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수도권과의 거리는 자동차로 다시 한 시간 가까이 단축됐다.

미내다리를 지나 시의 서남쪽으로 가면 '갱갱이'가 나온다. 놀뫼와 함께 논산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이곳 사람들만의 표현이 '갱갱이'다. 강경읍을 가리키는 사투리다. 논산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작은 포구 강경. 한국 땅에 강경 같은 곳은 둘도 없다.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와 근대화 이후까지 한 지역의 번성과 쇠락, 거기 얽힌 추억이 살아있는 유물 같은 곳이다.

"은진(恩津·논산의 옛 지역명)은 강경으로 꾸려간다는 말이 있듯 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에 끼여 있어 바다 사람과 내륙 사람들이 몰려 교역이 활발했다. 봄과 여름은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느라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토선(土船)과 만장이, 당도리선들이 황산(黃山)과 세도(世道)로 마주 나누어진 포구에 담처럼 둘러서서 꽹과리를 쳐댔고 화장(火匠)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다시 암회색의 바다였다. 한 달에 여섯번씩이나 열리는 장에는 전라도의 곡식과 경강(京江)으로 가는 조곡과 화물이 포구에 쌓였다."

소설가 김주영은 '객주'에서 강경 옛 장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1920년대는 '1원산 2강경'이라 해서 전국 2대 포구로 꼽혔고, 광복 전까지도 3대 시장 하면 대구, 평양(혹은 개성)과 함께 강경이 꼽혔다. 금강의 수운을 통해 내륙의 산물과 군산 쪽의 해산물이 함께 모였고 한창 때는 하루 100척이 넘는 배가 드나들고 2만∼3만 명의 전국 상인들로 북적댔다. 장터에는 극장, 술집, 요정, 젓갈집과 정미소 등이 들어서 항상 흥청거렸다.

강경읍내를 둘러보는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19세기말부터 강경 상권을 장악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세운 은행, 병원 건물과 주택이 쓰러질 듯 남아있다. 100여 년의 시간이 이렇게 한 지역 안에 고스란히 공존하는 곳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드물다. 강경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녀봉을 올라 본다. 오른편으로 논산평야의 들판이 펼쳐지고 그 곳을 흘러나온 논산천이 금강과 합류한다. 맞은편은 부여군 세도면의 들판이다. 금강은 흘러 군산 앞바다로 간다. 1987년 황산대교가 놓이기 전만 해도 강경 사람들은 150여m 남짓한 이 강을 배로 건넜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강경은 쇠락했다. 번성하던 강경 포구는 호남선 개통 등 육운의 발달에 따른 수운의 쇠퇴로 급격히 퇴락했다. 어디랄 것 없이 개발 바람이 휩쓸어 버린 이 땅에서 세워진 지 100년 된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다는 것은, 거꾸로 강경에서는 시간이 정지했음을 말해 준다. 이곳이 고향인 시인 박용래, 김관식과 후배 작가 박범신 등은 문학을 통해 강경의 어제를 기록했다. '놀뫼'는 바로 황산이다. 강경 황산나루의 옛 이름은 놀뫼나루다. 금강의 물길 너머 드넓은 들판으로 저녁해가 떨어질 때 강경을 온통 물들이는 짙은 노을, 놀뫼란 이름이 그래서 생겨났다. 김관식은 '하염 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하류(百江下流)/ 노을 밴 황산 메기'('황산 메기')라고 그 풍정을 표현했다.

논산 사람들은 이제 강경 되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1997년부터 강경 전통 맛깔젓 축제가 열리면서 타지 사람들도 강경의 추억을 다시 찾고 있다. 건축가들은 강경의 근대 건축물을 조사해 보존방안을 모색했다. 미술인들은 사진과 그림으로 그 자취를 기록했다. 논산시는 올해부터 2012년까지 10년 계획으로 '강경 고도 옛모습 되살리기' 사업을 벌일 방침이다. 황산벌에서 연무읍을 거쳐온 놀뫼 사람들은 강경 되살리기를 통해 그들 땅의 역사를 새로 쓰려 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 한국사의 현장과 추억을 되살리는 일이면서, 요즘 이 사회의 화두인 개발과 보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사진=박서강기자

● 30년 젓갈장수 박청수씨

"솜씨 좋은 주부는 소금 한 가지만 갖고 열두 가지 반찬을 만든다지 않아. 강경 젓갈 맛도 전통 있는 솜씨에서 나오는 거지."

강경 젓갈시장 '형제상회' 주인 박청수(61·사진)씨는 30년 동안 이곳에서 젓갈 장사를 해온 강경 포구의 산 증인이다. 동생 청일(60)씨와 가게는 다르지만 같은 상호를 쓰고 있다. "70년대부터 경제개발 하면서 도로교통의 발달로 강경 포구는 사양길에 접어 들었지. 하지만 그때까지 주로 매매되던 생선이나 건어물에 가려 빛을 못 봤던 젓갈시장은 오히려 부각되기 시작한 거야."

박씨 등이 만든 '전막'이라 불렸던 볏짚과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허름한 가게 4곳이 강경 젓갈시장의 시작이었다. 박씨의 가게 앞쪽에는 당시 건물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전막들이 지금은 매장 규모 평균 100평 내외의 대형 도매상 70여 곳을 포함한 100개 가까운 상점이 한곳에 모인 전국 최대의 젓갈시장으로 커졌다. 새우젓, 황석어젓, 멸치젓의 비릿한 냄새가 가득 배어 있는 박씨의 가게에는 1925년 강경노동조합 건물 신축 기념사진, 1930년대 수많은 돛단배가 정박해 있는 포구의 모습, 70년대 초 바지저고리 입고 담뱃대를 문 채 리어카에서 우동을 파는 노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어 포구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강경 젓갈시장이 유명해진 건 옛날 포구에 소금배, 생선배가 드나들 때부터 생선 다루던 솜씨로 맛좋은 젓갈을 담글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젓갈 중에서 좋은 것만을 선별해 구입해서 정성껏 발효시키기 때문이야." 박씨는 인근 폐선 철도의 지하 토굴에 젓갈을 저장한다고 했다. 강경 젓갈은 이처럼 10∼15도를 유지할 수 있는 폐광이나 저온 창고에서 3개월 정도 보관하는 전래의 발효법으로 맛과 품질을 유지한다.

97년부터 매년 10월에 열리는 강경맛깔젓 축제는 잊혀졌던 강경 포구를 사람들이 다시 기억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평소에도 100여대, 김장철이면 하루 200∼300대의 관광버스가 몰려와." OO상회,OO상점 등의 이름이 그대로 새겨진 옛 건물이 군데군데 남은 '근대사의 보고'라는 강경 포구의 골목길을 가리키며 박씨는 "그래도 젓갈시장으로 강경이 기운을 되찾아서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말했다.

/하종오기자

● 논산시 현황

위치 동 대전시, 서 충남 부여군, 남 전북 익산시, 북 충남 공주시

면적 615.5㎢

인구 16만 8,376명(5만 7,628가구)

행정구역 2읍 12면 2동

예산 2,182억 원

산업분포 1차 34.1%, 2차 15.3%, 3차 50.6%

특산물 딸기, 오골계, 젓갈, 대추 등

문화재 돈암서원, 노성향교, 윤증 고택, 팔괘정, 임이정 등

관광자원 관촉사, 쌍계사, 대둔산, 개태사, 노성산성, 탑정호, 황산벌, 옥녀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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