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10일 극작가 유치진이 69세로 작고했다. 유치진은 우리 신극(新劇)의 바탕을 만든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일제 말기에 국민연극운동을 통해 국내 연극계의 대일(對日) 협력을 이끌었고 해방 뒤에는 반공연맹 이사로 있으며 반공 선전극을 쓰기도 했지만, 유치진이 없었다면 20세기 한국 연극사는 한결 가난해졌을 것이다. 재주가 있어서 명망을 얻은 사람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20세기 한국사의 슬픈 대목이다.1953년에 발표된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유치진의 대표적 반공극으로 꼽힌다. "당이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인간이 당에 속하여 내가그 괴뢰가 되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거다. 나도 인간이 되어야겠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말살하려는 공산주의의 쇠사슬을 끊어야겠어"라는 이 작품 주인공 백석봉의 발언은, 수상쩍은 정치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만을 음미해 보면, 자율적·주체적 개인을 위한 진지한 송가(頌歌)로 읽힌다.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연극 활동에 뛰어든 유치진이 한국 연극계에 남긴 자취는 '토막(土幕)' '소' '자명고(自鳴鼓)' '원술랑(元述郞)' 등 수많은 희곡에 제한되지 않는다. 유치진이라는 이름은 그가 1962년에 서울 중구 예장동에 세운 연극 전문 소극장 드라마센터와, 두 해 뒤 그 극장의 전속 극단으로 창립한 동랑레퍼터리 극단에도 새겨져 있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세운 드라마센터에는 배우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연극아카데미가 딸려있었는데, 이 연극아카데미는 1974년 서울예술전문학교로 확대됐고, 다시 1998년에는 서울예술대학으로 발전해 연극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의 예술에서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고 종 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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