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제도량형총국(BOPM)은 주요 국가의 진공분야 측정기관의 측정능력비교 결과를 발표했다. 최고의 기술력을 자신하는 6개국이 참여한 이 경쟁에서 우리나라 표준과학연구원 진공기술센터는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보다 월등한 수준을 자랑하며 미국에 버금가는 최고의 측정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외국에서 "공동연구하자" "실험데이터를 제공해 달라" "한국 주도로 진공분야 국제 표준규격을 만들자"는 요청이 쏟아졌다. 연구원 진공기술센터장을 맡고있는 신용현(申容賢·42) 박사는 당시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신 박사는 1999년 진공기술 기반구축 사업 시작 때부터 실무책임자로 참가,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는 진공설비의 품질을 측정·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예컨대 인공위성 제작에 쓰이는 전선 가닥조차 이 곳으로 온다. 자칫 인공위성을 고철덩어리로 만들 오작동이 있을지 우주와 같은 진공환경에서 시험해 보기 위해서다. 전선 위에 물분자가 몇 개만 올라앉아도 검사결과는 오류. 그래서 검사시료는 질소로 채운 유리상자 안에 보관된다. 이런 식으로 72개 항목을 측정하는 실험기기를 신 박사는 모두 국내 업체에서 제작했다.
우리 진공 측정기술의 발전은 국내 반도체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뤄졌다. 하나의 생산라인에 수천개가 쓰이는 진공펌프는 2,3개월마다 부품을 갈고, 교체되는데, 그 때마다 성능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 칩 뿐 아니라 액정표시장치(LCD)나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생산라인에도 진공설비는 필수다.
그래서 국내 진공산업은 세계 시장의 8%(7조원)나 될 정도로 덩치가 크다.
문제는 정작 진공부품과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영세하기 짝이 없어 90%가 수입되고 있다는 점. 신 박사는 "한 대기업이 우리가 측정한 데이터를 받아본 뒤 부품을 국산으로 바꾸었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며 "측정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업체가 성장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 최고의 진공설비업체인 '어플라이드 머트리얼사'에 실험데이터를 들고 찾아갔을 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국내 부품업체의 제품을 우리가 평가할 테니 구매를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회사에서 너무 반색하는 거에요. 사실 우리 산업의 정보를 우리 손으로 갖다바치는 셈이죠."
신 박사는 연세대 물리학과 석사과정중인 1984년 연구원에 발탁돼 한국 진공기술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진공기술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아닙니다. '배경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첨단 연구도 모두 불가능합니다."
21세기 첨단산업으로 꼽히는 나노테크놀로지 역시 분자 몇 개를 다루려면 진공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신 박사는 앞으로 나노테크놀로지의 배경을 그릴 계획이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 진공기술이란
대기중엔 엄지손가락 한마디(1㎦) 안에 2.5갽10의19승개의 기체분자가 가득차 있다. 진공이란 기체분자의 밀도가 이보다 적은 환경을 가리킨다. 완전한 진공에 가까운 은하와 은하 사이 우주조차 이 크기 안에 1,2개의 분자는 존재한다.
진공환경은 압력차에 의해 힘이 생기고, 단열효과가 생기며, 생화학반응이 억제되는 등의 특성을 지녀 산업 각 분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이 없다. 보온병 생산부터 향과 맛을 유지하는 냉동건조와 진공포장 등 식품공학, 휴대폰 노트북 등 전자기기의 핵심 부품 생산, 핵융합장치, 나노테크놀로지까지 진공환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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