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지음 한길사 발행·1만5,000원"가장 심오하고 숭고한 예술은 정치적 예술이며 그리스 비극은 정치와 예술의 가장 이상적 결합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철학자 김상봉(45·문예아카데미 교장)씨가 밝히고자 한 핵심 메시지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쯤이 될 것 같다. 비정치적 순수예술을 숭상하는 이들에게 이런 언명은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라니.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이며 여기에서 가장 본질적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데 참된 만남은 타인의 슬픔에 참여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 비극은 슬픔 속에서 타인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숭고의 미학, 곧 정치적 예술이었다.'
그리스 비극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대화하듯 잔잔하게 편지체로 써 내려간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비극의 근본 정신과 역사적 배경을 밝힘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정치성을 강조한다. 그리스 비극은 단순히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한 예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인간의 미적 반성의 표현'이며 '비극 작가는 예술을 통해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가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아테네를 이끌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비극 작가들은 시인이기 전에 시민, 예술가이기 전에 정치가요, 군인이었다고 말한다.
'타인의 눈물이 낯설어진 시대'에 그는 왜 굳이 비극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는 비극이 '슬픔의 자기 반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슬픔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이 걸어야 할 길이며, 진리는 오직 슬픔 속에서만 계시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책을 닫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얼마나 더 깊은 심연으로 낮아져야 당신의 슬픔에 다가갈 수 있겠냐'고 안타깝게 묻고 있다. 이 간절한 독백은 우리 시대 이 땅에서 철학하는 자세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여기'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리스 비극의 정치적 미학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 접목해 보는 것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 지점에 이르면 책 속에서 내내 낮고 수줍기조차 하던 그의 겸손한 목소리는 단호한 빛을 띤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는 홀로 눈물 흘리고 그 눈물 값으로 우리는 박정희도 전두환도 없는 이 좋은 세상에 시름없이 자기의 쾌락에 탐닉합니다. (중략) 우리는 자기 상처의 쓰라림에 대해서만 예민해질 뿐 타인의 눈물과 이웃의 슬픔에 점점 더 둔감해져 갑니다." (264쪽)
운명과 죽음에 맞서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그리스 비극을 설명하면서, 1980년 광주에서 도청을 사수하며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시민군의 용기, 여순반란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신념을 포기하고 동료를 팔아 목숨을 건진 박정희의 비굴함을 대비하기도 한다.
또 그리스 비극 시인과 우리 시대 시인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로 미당 서정주를 꼽아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서정주 같은 시인은 현실에 침묵하면서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노래만 불렀던, '더도 덜도 아닌 기생'이다. '이처럼 시가 기생의 노래에 지나지 않을 때 시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이란 시인이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증명하는 알리바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오랜 만에 만나는 품격 높은 철학 교양서다. 담백하고 유려한 문체의 쉬운 글쓰기는 독자를 철학의 세계로 부드럽게 끌어들이면서 감동과 즐거움에 젖게 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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