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명분쌓기 만큼이나 물밑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것이 있다. 이라크에 매장돼 있는 엄청난 석유를 둘러싼 이권싸움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축출해 이라크를 민주사회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거창한 명분도 석유를 탐내는 검은 속셈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한다. 이미 전후 이라크 석유산업을 겨냥, 미국의 거대 석유메이저 업체들은 미국 정부는 물론 예상되는 차기 이라크 권력자들에 줄대기 바쁘고, 이에 뒤질세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도 발빠르게 이라크 주변을 넘나들고 있다.이들이 이라크 석유에 대해 사활을 건 행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매장량을 가진 이라크 석유가 마지막 남은 에너지 보고(寶庫)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라크 석유는 지표면에서 가장 가깝게 묻혀 있어 채굴조건과 품질 면에서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우방들이 미국의 전쟁 강경론에 때로는 반대를, 때로는 온건한 제스처를 보이며 복잡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전후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받기 위한 복잡한 계산이 배경에 깔려있다.
막후에서 전개되는 석유메이저 업체들의 숨가쁜 경쟁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석유전쟁은 벌써 본격화했다. 선두주자는 러시아다. 유엔이 이라크에 석유수출 제재를 결정한 1996년 이후에도 러시아는 석유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와의 교역으로 40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선뜻 나서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 석유산업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이 전쟁으로 어떻게 뒤바뀔 지 점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미국이 보장만 해준다면 어차피 미국이 밀어붙일 전쟁에 쓸모없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100억 달러에 달하는 러시아의 대 이라크 채권을 미국이 반대급부로 보전해 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에는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인 루크오일이 77년 남부 웨스트―쿠르나2 유전에 대해 이라크 당국과 체결했다 지난해 말 파기됐던 37억 달러 규모의 유전개발계약을 복원했다. 쿠르나 유전 외 수바, 루하이스, 키르쿠크 등 7∼8개의 유전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있는 러시아는 지난달 17일 바그다드에서 자국업체인 스트로이트란스, 소유즈네프테 두 가스회사와 이라크 당국 간 유전개발계획을 추가로 성사시켰다.
프랑스 최대 석유회사인 토탈피나 엘프는 지난해 동남부 나흐르 우마르와 마즈눈 유전 등 2곳을 개발키로 가계약했고, 중국 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는 남부 루마일라와 중서부 아다브 유전 개발권을 따냈다. 이밖에 개발경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베트남 시리아 등 업체들이 유엔 제재조치 해제 후 실행할 계약만도 30건이 넘는다.
그러나 열쇠는 역시 미국이 쥐고 있다. 전쟁을 주도한 미국이 전후복구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석유회사인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딕 체니 부통령은 이달 초 엑손모빌 세브론텍사코 코노코필립스 핼리버튼 등 미국 석유회사들과 전후 이라크 석유생산에 대한 협의를 가졌다. 베이커 휴즈, BJ서비스, 웨더포드 인터내셔널 등 중소업체들도 사업참여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핼리버튼과 쉴럼버거 등 석유개발회사가 15억 달러 규모의 개발권을 따낼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후세인 정권이 유전시설을 불태울 경우 벡텔그룹이 복구작업을 주도할 것이라는 말도 설득력있게 나돌고 있다. 이라크 반정부 단체들이 전후 석유공급권을 미국과 영국에 제공할 뜻을 공공연히 비치고 있어 개전이 임박할수록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각국 석유업체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질 게 틀림없다.
이라크 전쟁에는 OPEC 무력화 기도까지
석유를 노린 이라크 전쟁은 정치적으로 사우디의 석유무기화 전략을 무력화하고 궁극적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가격카르텔을 무너뜨린다는 뜻도 내포돼 있다는 게 전쟁 반대론자들의 시각이다. 73년 4차 중동전쟁과 79년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두차례 엄청난 오일파동을 겪은 미국은 막대한 석유를 갖고 있는 사우디의 현실적 영향력을 받아들여 OPEC와의 관계개선을 석유가 안정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9·11 이후 대 이라크전까지 사우디와 사사건건 불화를 빚어온 미국이 이라크 석유를 앞세워 사우디의 정치력을 무력화하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 메이저 석유업체들 사이에서도 포스트 후세인 이후 이라크의 산유량 문제와 OPEC 해체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0년대 석유메이저에 의해 장악됐던 국제석유시장을 공급자 중심으로 재편시킨 OPEC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석유가 서방에 넘어간다면 가뜩이나 결속력의 한계를 안고 있는 OPEC 내에 석유생산 경쟁이 촉발돼 회원국 간 심각한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이라크석유가 뭐기에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확인된 것만 1,120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2,618억 배럴)에 이어 세계 2위다. 잠재 매장량으로 치면 2,200억 배럴에 달한다. 서부 사막지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층 깊은 곳의 유전까지 포함하면 전체 매장량은 훨씬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 확인된 유전은 대부분 이라크 남부에 몰려 있다. 1990년 걸프전 이전까지 전체 생산량의 3분의 2가 남부에서 생산됐다. 이 곳 남부는 이라크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권력에서 소외된 시아파가 밀집해 사는 지역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소수인 수니파 출신이다. 걸프전 때 이 곳 유전시설의 상당부분이 파괴됐지만 생산량은 여전히 가장 크다.
걸프전 이후 10여년 간 기술 및 투자 부족으로 이라크의 유전 시설은 매우 낙후한 상태이며, 전체 73개의 유전 가운데 현재 24개만이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원유 생산량은 걸프전 이후 미국 주도의 금수(禁輸)조치로 종전 하루 350만 배럴에서 30만 배럴로 줄었으나, 96년 원유 수출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면서 2001년에는 하루 245만 배럴까지 늘어났다.
아메르 라시드 이라크 석유장관은 지난해 이라크의 원유 생산능력이 하루 320만∼330만 배럴이며 2003년 말까지는 350만 배럴로 늘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1년 유엔 보고서는 생산 기술과 인프라가 개선되지 않으면 이라크의 원유 생산능력은 급격히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라크는 이 같은 문제를 새로운 유정(油井) 개발 계획으로 대처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 중국 등 외국 기업을 끌어 들여 417개의 유정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이라크 원유는 품질 또한 매우 다양하다. 미국석유협회의 비중 측정 단위인 API 기준으로 24∼42도의 경질∼중질유가 폭 넓게 분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라크의 원유는 생산비용이 배럴 당 1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유엔의 경제제재 이후 이라크 경제는 원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국내 총생산(GDP)에서 석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달하며 외화의 95%를 원유 수출로 얻는다. 생산량의 대부분인 하루 150만∼200만 배럴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수출 규제로 이마저도 크게 줄었다. 수출물량의 30%는 러시아에, 나머지 70%는 키프러스 수단 파키스탄 중국 베트남 이탈리아 등으로 나간다. 이들 원유는 다시 여러 나라로 재판매되는데, 지난해 미국은 이라크 원유를 하루 56만 배럴씩 수입했다.
이라크는 천연가스 매장량도 확인된 것만 110조 입방피트에 이른다. 2000년에는 1,110억 입방피트의 가스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는 후세인이 집권하던 1979년 7,000억 입방피트에 비하면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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