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함락된 서울에서 한달 이상을 갇혀 있어야 했다. 전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거니와, 당시 인민군은 승전보를 올리고 있던 터라 사람들을 끌고 간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숙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1950년 7월말 나는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학교로 갔다. 그러나 학교는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 천지였다. 나는 발길을 돌려 동사무소로 갔다. 소위 전출증을 끊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리를 당연시했던 인민군들은 서울에만 인력이 몰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인민군이나 의용군을 도와 노력봉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전출증을 끊어주고 있었다.
전출증을 받은 나는 이화여대에 다니고 있던 셋째 누님 하숙집으로 향했다. 종로통을 빠져 단성사 근처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여학생들이 내 팔을 붙들었다. 의용군에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완강히 거절하면서 그들을 뿌리치고 도망가려 했으나 마침 반대편에서 총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면초가였다. 나는 꼼짝없이 단성사로 끌려들어가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영화관 2층에 자리를 배정 받았다.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어깨에 쌀 부대를 짊어진 젊은 사람이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성균관대 학생이었는데 집에 쌀이 떨어져 쌀을 사가다가 끌려왔다고 말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끌려갈 때 끌려가더라도 쌀은 집에 갖다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내 말에 일리가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친구는 감시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정 이야기를 했고, 나는 상황이 궁금하던 터라 그 친구 옆에 서서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있었다. 우릴 감시하던 사람은 총 든 사람을 부르더니 외출증을 끊어주면서 "두 사람을 집에 데려다 준 뒤 다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쌀 부대를 진 성균관대생 옆에 서 있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단성사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총 든 사람이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한참 동안 이야기에 열중했다. 언뜻 "안죽고 살아 있었구나"는 말이 들리는 걸로 보아 서로 고향 친구 사이인 듯 싶었다. 기회였다. 나는 천천히 쌀을 든 친구와 함께 출입구쪽으로 움직였다.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에게 외출증을 보여준 뒤 출입문을 나오자마자 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총 든 사람이 사태를 눈치채고 쫓아 오기 시작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담을 넘었다. 마침 단성사 뒤에는 내가 아는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이 있었다. 재빨리 병원을 찾아가 친구에게 "몸을 숨겨달라"고 부탁해 병원 지하실에 숨었다. 집집마다 수색을 벌이던 추격자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친구는 오히려 그들에게 큰 소리를 쳤다. "아니, 인민병원에 이렇게 무작정 들이닥치는 법이 어디 있소. 당신들 책임자가 누구요. 내 당장 가서 따져야겠소." 그때만해도 의사와 병원이 귀하던 때라 인민군들은 개업 병원이면 어디든 인민병원 간판을 걸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기지로 추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하숙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대책을 상의했다.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면 고향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강 짐을 꾸려 한강변으로 갔다. 다행히 나룻배를 한 척 구할 수 있어 몸을 싣고 고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고향에서는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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