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울대 상대는 예과, 본과로 나뉘어져 예과 2년을 마쳐야 본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본과 3학년이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날 아침 난 교회에 있었다.예배 도중에 누군가가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렸고 교회는 삽시간에 술렁거림으로 가득찼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일시적으로 도발한 북한 인민군을 물리치고 있으니 휴가장병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얘기만 나왔다. 북한 인민군의 도발은 종종 있던 일인데다 방송에도 특별한 내용이 없어 나와 교인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귀가했다. 거리에는 장병들을 태운 트럭과 버스가 분주히 오갔지만 그것이 기나긴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나는 다음날 태연히 장충동 하숙집을 나와 학교로 갔다. 강의는 모두 휴강이었다. 나는 일단 귀가했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다시 학교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멀리서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가까운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은 이미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피난민들로부터 전황을 전해들은 우리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의 침공은 계획적이었으며,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고, 머지않아 서울이 함락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동숭동 부근에서 하숙을 하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 함께 라디오를 들었지만 여전히 인민군이 패퇴하고 있다는 거짓 뉴스만 계속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시각 방송국은 이미 인민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정부와 방송을 믿고 있던 우린 꼼짝없이 적에게 함락된 서울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게 돼버렸다. 하긴 피난을 가려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국군이 한강 다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예고 없는 한강 폭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을 때, 정부 관계자들과 가족들은 이미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의 분노는 지금도 생생하다.
6월28일 아침 하숙집을 나서 시내로 나갔다. 하지만 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집을 나설 때 정부미 배급 창고가 열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창고는 엉망이었다. 피난민이나 누군가가 창고를 털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하숙집 친구와 함께 창고에 남아있던 쌀을 날랐다. 하지만 이내 하숙집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숙집 주인은 성균관대 교수로, 먼 친척 되는 분이셨다. 그 분은 대뜸 "당장 쌀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호통을 치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쌀을 가져갔고, 도로 갖다 놓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가져 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그 말씀만큼은 따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모님께 사정을 말씀 드리고 일본식 다다미 밑 공간에 쌀 3가마를 비축해 놓았다. 일을 끝낸 뒤 우린 다시 거리로 나섰다. 큰 거리에 다다르니 국군 3명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허기에 지쳐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가 사모님께 부탁해 감춰두었던 쌀로 밥을 지어 그들에게 나눠줬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그들은 허겁지겁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상을 비운 뒤 장충단 고갯길을 넘어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한 30여분 가량 지났을까. 처음 보는 군복 차림에 빨간 깃발을 앞세운 인민군들이 장충동 네거리쪽에서 들이닥쳤다.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완전 점령된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보자마자 물은 첫 마디는 "동무, 국방군 못 봤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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