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도 저 혼자 크는 법은 없다. 내 동기들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훌륭한 교수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동기들이 돈독한 사제지정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극한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스승과 제자를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정반대의 위치로 내몰았다.내가 대학을 다닐 무렵은 서울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데다 우리 말로 강의를 시작한지 겨우 1,2년 지났을 무렵이어서 요즘처럼 교수진이 제대로 구성돼 있지 않았다. 특히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당대의 석학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때라 교수 부족 현상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보석과도 같은 명강의로 학문을 보는 눈을 깨우쳐 준 분들도 많았다.
당시 명 강의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분은 헌법과 정치학을 가르친 김상협(金相浹) 교수였다. 훗날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 교수는 고대 총장직을 맡은 뒤에도 서울대에서 강의를 할 정도로 우리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 때만해도 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학문과 조국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결코 예를 벗어나는 언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담고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통해 우린 강의실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이런 자리에 자주 어울렸던 분이 경제정책을 강의하신 유모 교수와 농업정책을 강의하신 이모 교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분은 6·25를 거치면서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어갔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유 교수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발탁돼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고 , 두 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나름대로 남한 정권의 핵심에서 활동한 것이다. 반면 이 교수는 좌익 활동을 택했다.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후 한동안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어느날 충무로에서 뜻밖에도 이 교수를 만났다. 그 때 이 교수는 인민군 치하에서 한국은행의 책임자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9·28 수복 후 소식이 끊겨 월북을 했는지, 남한에 남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존경하던 분이 좌익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밖에 민법을 강의했던 어떤 교수는 6·25 당시 러시아어과 교수의 권유로 인민군에 협조했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월북해 김일성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교수는 그러나 전후 남한 정세 파악을 위해 남파돼 간첩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갔으나 두 번째 남파됐다가 대구에서 검거됐다. 그러나 그 교수는 능력을 높이 산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석방돼 비록 서울대는 아니었지만 다른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다.
또 한 분, 우리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분이 영문학을 가르치신 김 모 교수였다. 그는 자그마치 2만석이 넘었던 대갑부의 아들이자 경성제대 영문학부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나 김 교수는 좌익 사상에 물들어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의 비서로 활동했다. 김 교수는 6·25가 끝난 뒤 월북했는데, 그 이후 아무도 소식을 알지 못했다. 모두가 그를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날 나는 TV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이는 정전회담 소식을 전하는 TV뉴스를 보던 순간, 나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북한군측 통역관으로 나온 사람이 김 교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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