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인 2000년 벽두 일본에서는 '언력(言力)의 정치' 논의가 활발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의 자문 기구인 '21세기 일본의 구상 간담회'가 10개월 간의 논의 결과를 담은 보고서에서 '앞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언력 정치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에 다나카 아키히코(田中明彦) 도쿄대 교수도 저서 '워드 폴리틱스'(Word Politics)에서 언력 정치를 강조했다.양측의 논지는 같았다. 국제정치가 군사력 위주의 권력 정치(Power Politics)에서 경제력 중심의 금력 정치(Money Politics)를 거쳐 이제는 말의 힘을 무기로 하는 언력 정치로 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언력의 내용을 정보력과 상상력에 바탕한 제안력, 표현력과 설득력이라고 본 것도 같았다.
공교롭게도 당시 일본 정치는 유례 없는 눌언(訥言)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그 해 4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오부치, 그 뒤를 이은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일반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언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외교력 제고 측면에서 시작된 언력 논의는 이내 일본 국내 정치를 도마에 올렸다.
이어 등장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달랐다. 그의 뛰어난 말 솜씨는 언력에 목마른 일본 국민의 갈증을 풀어 주기에 족했다. 무엇보다 직설적이고 칼로 자르는 듯한 명쾌한 어법은 점잔을 빼는 정치 어법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투박하기까지 한 그의 말에서 대중은 인간적 진솔함을 읽었다. 특히 유행어와 구조가 닮은 "감동했어요" "말도 안 돼요" 등 그의 말은 대중의 감성에 닿아 폭발적 힘을 얻었다.
이에 더해 그는 얼굴의 힘, '안력'(顔力)까지 갖추었다. 굵은 웨이브의 퍼머 머리와 긴 얼굴은 이국적 멋을 느끼게 할 만했다. 희로애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도 서민적 정치인, 관행을 깨는 개혁 정치인의 이미지를 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와 딴판으로 집권 2년이 다 되도록 그는 변화를 가져 오지 못했다. 집권 자민당의 파벌 정치, 금융 불안과 경기 침체 등은 여전해 '새 정치'와 '경제 개혁'은 구호로만 남아 있다.
이를 두고 언력·안력 정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애초에 설득력이 핵심 내용으로 거론된 것과 달리 현실의 언력 정치는 대중적 이미지가 잣대가 됨으로써 진실과 거짓이 자리바꿈을 했다는 개탄이었다. 이런 지적도 있었다. '설명하고 규정하지 않는 시는 그 언어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과 결합해 순간적 폭발력을 가지는 반면 소설은 그 틀에 독자를 가두는 설득력이 기본이어서 순간적 힘을 띠긴 어렵다. 사람들은 때로 소설적 언어의 진실성보다 시적 언어의 허위성에 사로잡힌다.'
눈을 우리 쪽으로 돌려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대선에서 타고난 언력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개성 있는 얼굴과 표정 등 얼굴의 힘도 갖추었다. 말하자면 시적 언력에서 그는 이미 달인이다. 그러나 선거와 달리 국가 경영에는 호흡이 긴 소설적 언력이 요구된다. '국민의 정부' 뒤끝을 흔드는 대북 비밀지원 논란을 보는 터라 진실한 말의 힘이 더욱 절실하다.
황 영 식 문화부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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