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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패트롤]고군산 군도 보물선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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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패트롤]고군산 군도 보물선 찾는 사람들

입력
2003.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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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보물선)야 틀림없이 있지라. 사람들이 거짓말허지 배가 거짓말 허겄소."전북 군산 내항에서 배로 90분이면 닿는 선유도. 그 곁으로 무녀도 신시도 등 10여 개의 올망졸망 뜬 섬들을 싸잡아 고군산 군도라 한다. 이 일대 주민들에게 금배의 존재는 '전설'이기에는 아직 이른, 엄연한 '진실'이었다.

지난 30여년 간 적지 않은 '포티나이너스(1849년 미국 서부 개척시대 노다지를 찾아 떠난 사람들)'들이 보물선을 찾아 뻘 바다 속을 누볐고, 보릿고개 다음으로 가장 힘들었다는 'IMF' 를 만나면서부터는 아예 러시를 이뤘다. 동, 서, 남해를 가리지 않았다. 울릉도 근해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호', 인천 옹진군 청나라 '고승호', 남해안 전남 진도의 죽도 하야시 보물선, 선유도의 일본 '쾌창환호' 등 꽤 알려진 것들만도 10여건에 이른다. 하지만 알려진 성과는 아직 단 한 건도 없다.

보물선의 '전설' "'쾅' 함서 불길이 막 솟더만. 배에 실렸던 쌀 가마와 명주 다발에 불이 붙었던지 바다 위에 불덩이가 한참을 떠 있더니 가라 앉았제." 선유도에서 나고 자란 남모(84) 씨는 58년 전(1945년) 일을 엊그제 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야그(이야기)를 보물선 찾겄다고 온 사람들 헌티 수 백번도 더 해줬응게." 25살에 선유도로 시집 온 이모(52) 씨도 "시아버지가 직접 본 일"이라며 당시 가라앉은 일본 배가 여러 척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보물을 싣는 부역에 동원됐거나, 금 궤짝 비슷한 것이라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침몰선을 '금배'라고 불렀다. "왜놈들이 도망감서 돌뎅이 뺏어 갔것소? 보나 마나 돈 되는 것만 실었을 것이요." '고데구리(저인망·그물로 바다 밑바닥을 긁어내는 어업)' 어부들은 늘 그물질하던 곳에서 뭔가에 걸려 그물을 찢긴 경험들이 적잖이 있고, 그것이 보물을 빼앗긴 원혼들이 배의 마스터나 닻을 빌어 그물을 붙잡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워떤 보물인디 아무 눈에나 띄이겄소. 덕 있는 주인이 안즉 안 나타난 것이제." 한 민간인에 의해 최근 밝혀진 일본방위연수소 전사실의 극비문건인 '대동아전쟁 상실(喪失)선박 일람표'에는 당시 침몰한 215척 가운데 40여 척이 서해에서, 그 가운데 10여 척이 고군산 군도 인근에서 가라앉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또 시기는 일본 패망 직전인 45년 4∼7월에 집중됐다.

초잔마루(長山丸)의 저주? 1970년, 부산 갑부로 알려진 김모(당시 약 55세)씨가 자신의 일본 와세다대학 동문인 가이바라 게이찌 씨의 편지를 받는다. 45년(소화 20년) 5월17일 위도 북북서 15㎞지점(선유도 인근)에서 미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한 일본 대련기선(신화해운 전신) 소속 화물선 초잔마루(3,938톤)를 함께 찾자는 것.

당시 배의 선장이던 해군 중장 미아사토 히데도쿠(宮里秀德) 제독의 당번병이었다는 그는 침몰선에 금 28톤과 보석 4박스가 실려 있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3년 여간 그들은 군산 앞바다를 누볐지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고, 실의에 젖어 살다 숨을 거둔다.

하지만 그들의 탐사는 제2, 제3의 탐사팀을 불러들였고, 적지 않은 이들이 가산을 탕진했다. 90년대 초에는 해저 케이블 매설업자인 이모 씨가 초잔마루에 금 300톤과 은화주물 명주실이 적재됐다는 미군 군사기밀 문건을 믿고 덤볐다가 1년여 간 전 재산을 털어 부은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시청 항만계에 접수된 초잔마루 탐사 신청 및 허가 건수는 최근까지 5차례.

하지만 이는 1∼2년의 공식적인 장기 탐사일 뿐, 뜨내기들의 비공식적인 조사는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추정이다. 그 사이 '이용호 사건' 등 보물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기 사건이 잇따르면서 탐사가 중단됐고, 초잔마루는 '금기(禁忌)'의 단어로 치부됐다.

뻘 속의 진실, 일제의 치부? 산소통 매고 가면 '동네 약치는 날이냐'는 소리를 듣던 70년대 초부터 다이빙을 해왔다는 국내 스쿠버다이버 1세대 채상훈(48)씨. 초잔마루에 '빠져' 30여년 동안 군산 앞바다를 맴돌던 유모(72·인천 부평구)씨의 부탁으로 한 두 번 탐사를 돕다가 오기가 발동, 99년 4번째 탐사자로 직접 나섰다.

어부들의 증언을 토대로 어군탐지기로 해저 지형을 탐색, 가능성 있는 지점에 200여 개의 부표를 띄우고 확인을 해나가던 그는 2000년 4월 수심 32m 바다 밑 굳어진 뻘 속에 파묻힌 거함의 선체 일부를 발견했다.

그는 "이 배가 남들이 말하는 보물선인지는 아직 모른다"며 "하지만 침몰선에서 찾아낸 대련기선 마크가 찍힌 접시와 선체의 길이(약 107m), 침몰 지점 등을 볼 때 초잔마루 임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2001년 9월까지 배의 조타실 근처 샤워실과 기관실 식당 석탄창고 등을 탐사했지만 자금이 바닥난 데다 이용호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하면서 그도 작업을 중단했다. 그는 최근 문헌조사를 통해 그 배가 초잔마루임을 확신하는 또 다른 동지(백준흠씨)를 만나 군산시에 공유수면 점·사용허가를 신청, 4월께 다시 탐사에 나설 참이다.

"1년이라고 해도 탐사는 날씨와 조류 때문에 길어야 50여일 밖에 못합니다. 이제 본창(화물칸)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조만간 뭐든 나올겁니다." 그도 재산 대부분을 쏟아 부은 터. 보물 욕심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뻘 속에 묻힌 역사 발굴'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보물보다는 도망가던 일본인들의 '보따리' 속을 까뒤집어 보고 싶습니다. 거기서 노자라도 건지면 우리 해역의 모든 침몰선을 찾아내는 데 쓸 참입니다."

현행 국유재산 매장물 발굴법상 해상 발굴물의 20%(육상은 40%)는 국가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발굴자의 몫이다.

/군산=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침몰 日화물선 "초잔마루" 정황상 가능성 있어 주목

일제가 전후 복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패망 직전 약탈한 보물을 본국으로 옮긴 것은 여러 문헌 등을 통해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 남지나 지역 군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의 이름을 딴 '야마시타 보물선' 상당수가 연합군 공격에 침몰했고, 미처 배에 싣지 못한 보물 일부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등지 모처에 감춰져 있다는 설이다.

탐사가들이 초잔마루(사진)에 주목하는 것은 민간 화물선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장성이 지휘했다는 점, 일본방위연수소 전사실 극비문서인 '대동아전쟁 징용선박 행동 개견표'에서 밝혀졌듯이 전투함의 호위를 받았다는 점, 45년 1월31일 대만 기륭항에 정박한 뒤 5월17일 선유도 해역에서 침몰할 때까지 행적이 전무한 점 등 때문이다.

하지만 취재과정에 만난 한 관계자는 보물을 보기도 전에 보물선이라고 떠벌리는 것은 사기라고 했다. '보물선 찾기'의 부작용과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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