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전 서독 정부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시작으로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고 많은 지원을 했다. 서독과 베를린간의 통행료와 도로사용료를 일괄지급했는가 하면, 1963년부터 89년까지 총 33,755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고 이산가족 25만여명을 재결합시키는 대가로 34억5,000만 마르크를 쏟아 부었다. 또 동독주민이 서독을 단기 방문할 경우, 방문환영금을 제공함은 물론, 동독주민의 의료지원을 위해 많은 물자를 제공했다. 83년과 84년에는 2회에 걸쳐 총 19억5,000만 마르크를 지급보증해 외환지불유예 위기에 빠진 동독을 구해냈다. 그 외에도 동독이 내독 교역시 서독 물자를 외상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총 74억 마르크를 정부차원에서 지원했다.민간부문의 지원은 정부 지원보다 월등히 많았다. 서독주민은 통일시까지 서독정부가 지원한 액수보다 2배가 훨씬 넘는 748억 마르크에 달하는 금액을 동독주민에 대한 선물, 현금송금 등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독의 대 동독 지원은 우리의 대북 지원과는 크게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서독의 대동독 지원은 철저하게 동독지역과 서독 주민의 편의를 위해 쓰여졌다는 점이다. 서독은 동독주민의 인권신장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일이라면 그 액수에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지원했다.
두 번째로 서독은 크고 작은 지원에 항상 조건을 달아 대가지급의 형식으로 돈을 주었다는 점이다. 가령 19억5,000만 마르크의 대 동독 현금차관을 지불보증하면서 협상개시 조건으로 먼저 동·서독간 국경에서 여행규제 완화와 총격사살 행위 금지를 요구하였다. 이후 국경에서는 여행 수속절차가 대폭 완화되고 총격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대동독 지원이 투명했을 뿐만 아니라, 서독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동독 지원이 철저하게 동독주민을 겨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원에 있어 항상 조건을 부여했기 때문에 서독 정부의 정책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2억달러 대북 지원은 그것이 제공될 당시만 하더라도 남북이 연합제를 이루고 통일로 가는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원대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당시 모두들 통일을 생각하는 큰 꿈을 가지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숨기면서 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또 하나는 지원을 하고서도 정부 당국의 책임자들이 하나같이 그 사실을 부인한 일이다. 이는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정책에 배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 된다. 2억달러 지원은 포용정책이라는 기조면에서는 바람직할 수 있으나, 방법면에서는 재고해야 할 점을 일깨우고 있다.
김 영 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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