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4일 미국 신문재벌 허스트 집안의 상속녀 퍼트리셔(패티) 캠벨 허스트가 버클리의 아파트에서 도시 게릴라 단체 공생해방군(共生解放軍:SLA) 단원들에게 납치되었다. 당시 19세의 패티 허스트는 납치된 뒤 두 달 만인 4월4일 라디오 방송국에 보낸 녹음테이프를 통해 자신이 '민중의 권리 회복'이라는 SLA의 대의에 완전히 공감한다고 밝힌 데 이어, 4월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선셋거리의 하이버니아 은행 강도 사건에 다른 SLA 단원들과 함께 카빈총을 휘두르며 가담한 모습이 비디오 카메라에 잡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패티 허스트의 이런 행태는 피랍자가 납치자와 함께 생활하다가 결국 납치자에게 동조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허스트 신드롬'이라는 말을 낳았다.패티의 아버지 랜돌프 허스트는 SLA의 요구에 따라 수백만 달러 어치의 식료품을 캘리포니아의 빈민가에 뿌리고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들에 이 극좌 혁명단체의 광고를 실었으나, SLA가 이제는 자신들의 동지가 된 패티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협상이 중지되었다. 체 게바라의 여자친구 이름을 따 '타니아'로 개명까지 한 패티는 그 뒤에도 몇 차례 SLA의 '보급투쟁'에 가담한 끝에 1975년 9월 두 명의 다른 SLA 단원들과 함께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FBI는 패티를 강도 혐의로 기소했다. 패티의 변호인은 그녀가 세뇌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배심원은 유죄평결을 내렸고, 그녀에게는 강도죄에 대한 법정 최고형인 징역 25년에다가 화기(火器)남용죄에 대한 10년이 얹어져 징역 35년이 선고되었다. 이 형량은 재심에서 7년으로 줄었다. 패티 허스트는 21개월을 복역한 뒤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결정으로 1979년 가석방되었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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