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정을 맞아 서울에 사는 손주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일년에 한 두 번 보는 것이 고작인데 볼 때마다 부쩍부쩍 크는 모습을 보면 그저 껴안아주고 싶고, 할아비 사랑도 쏟아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더군요. 녀석들도 간식거리를 찾아 제 할미 곁에는 가도, 제 옆으로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할아비 냄새가 나서 그러는지, 고리타분한 설교를 들을까 봐 그러는지, 서운한 마음도 듭니다. 어떻게 하면 손주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을까요.(전북 익산 정씨)
답>부모자식 관계는 키우다가 생긴 애증이 쌓인 복합적 관계로, 중립적인 면에서 정을 주고 받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에 비해 한 세대를 건너뛰는 조부모와 손주들 관계는 이해관계와 책임이 직접적으로 닿는 것이 아니기에 비교적 순수한 정을 나누기가 쉽지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는 무섭거나 극성이거나 나빴더라도 손주들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 할머니로 비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그러니 모처럼 보시는 손주들이 할아버지이신 선생님보다 할머니 곁에 가려는 것이 좀 씁쓸하시겠지요.
성인들을 상담하면서 가족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할아버지는 먼 발치 인상이나 집안과 사회적인 위상을 가지고 회고하는 반면 할머니는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느냐라는 관점에서 말합니다. 서양영화에서처럼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살을 맞대고 지내던가 또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무엇을 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겪던 애증을 말하는 경우란 퍽 적습니다. 대신 얼마나 당당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자랑스러운 분이셨느냐가 손주들에게는 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할머니와의 인기경쟁을 포기하십시오. 여자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상대를 조정하는 모성애적 본능이 있어 못 당하십니다. 세배 받으시기 전에 냄새제거에 신경을 쓰시고, 받으실 때는 손주 하나씩 하게 하고 그때마다 앞으로 불러 껴안고 쓰다듬어 주시면서 시간을 좀 끄십시오. 그리고 돈을 직접 주십시오.
그러나 지나친 피부접촉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할아버지가 껴안아주는 것을 요즘 애들은 질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요새 며느리들은 시아버지가 제 자식을 너무 오래 껴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춥지 않으면 애들을 밖에 데리고 나가 잠시 놀아주신다면 아마 손주들 인상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명예교수 dycho@dyc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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