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가지 않고도 쇼핑을 할 수 있고 은행에 가지 않고도 입출금을 할 수 있고, 학교에 가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으며, 거래처 직원을 만나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는 세계, 우리가 사는 인터넷 세상이다. 우리 사는 세상은 방안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모든 세계와 교류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도 경험하기 어려웠을 그런 세상이다.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그런 인터넷 세상은 세계 자체를 바꿔버렸다. 무한 팽창하는 우주처럼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시장은 무한팽창 과정을 거쳐왔다. 단순히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세계를 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화면상에서 모든 일이 처리되는 데 주목해야 한다. 화면으로 공부하고 화면으로 업무를 익히며 화면으로 회의를 하고 화면으로 거래를 한다. 표면상으로는 화면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인터넷 의존성이며 그 결과는 미디어 바깥의 삶을 사적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사적 공간이라는 것은 개인의 진실이 숨을 쉬는 실존의 공간이라기보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무의미한 공간이다.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이 모두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 이 세상은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고 무서운 세상이다. 그 무서움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살과 피가 도는 인간의 삶을 화면에 가두는 거세된 세계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번 인터넷 대란을 통해서 엿본 바로 그 점, 인터넷 시스템이 교란되었을 경우, 세계가 교란된다는 그것이다.
인터넷 시스템 속에 바이러스의 침투는 그 자체가 무서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는 누가 적인가, 누가 악인가? 여기서는 선과 악이, 적과 동지가 따로 있지 않다. 이 기습적인 악마는 단순히 무심한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기습을 받은 우리들을 또다시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받은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교란 자체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연결망 자체가 한 순간에 교란된다. 그것이 현대문명의 파멸이다. 파멸의 순간은 일시적이다. 문명의 최첨단인 바로 그 시스템은 어쩌면 문명 파멸의 예고편인지도 모르겠다.
감성과 다르게 지성은 언제나 문명을 세우는 것이었다. 지성적이라는 것은 반본능적인 것이고 반자연적인 것이었다. 원초적이고 생동감있는 자연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그 만큼이 바로 지성의 순도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지성은 그렇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환경보호론자거나 생태주의자다. 왜 21세기의 지성은 그렇게 친자연주의적인가? 왜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원초적인 자연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가?
21세기의 지성은 여느 세기와 다르게 인간이 세운 문명에 대한 예지적 불안이 있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면서 마침내는 화면 속에 갇혀 왕자와 공주 노릇을 해야 하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 때문에 그들은 자꾸 인간이 버리고 온 자연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고 항변했던 지성들이 이제 인간은 동물이라고, 그래서 깨끗한 햇빛과, 농약의 세례를 받지 않은 넉넉한 땅이 필요하다고, 유기농법으로 거둬들인 쌀과 감자와 채소를 나눠먹는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터넷 세상은 거부할 수 없는 미래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이 화려하게 약속한 정보민주사회의 꿈만 꾸고 있기에는 어쩐지 불안하다. 지금 이 인터넷 대란은 정보보안시스템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한 불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인터넷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는 지를 엿보게 해준 증후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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