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는 급속히 진척되어 갔다. 철도는 불원간 이 고을로 들어오게 되었다. 벌써 읍내 뒤에는 정거장을 닦고, 역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철도가 이 고을 읍내로 놓인다는 소문이 돌면서 왜놈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장사꾼은 물론, 철도판의 노가다패들과 체신국의 관리들과 전기 기술자, 청부업자들이 패패로 들어왔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소설가 이기영(1895∼1984)이 월북 이후에 쓴 대하장편소설 '두만강'초반에 충청도 송월동 경부 철도 부설 공사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성장했으니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는 그의 소설의 무대는 아마도 천안 일대일 것이다. 천안은 그로부터 꼭 100년 만에 다시 개발 열기에 들뜨고 있다. 국가 숙원 사업인 고속철도 중부역사 건설 작업이 천안과 아산 경계 지점에서 올해 첫 삽을 뜰 예정이고, 수도권 전철 연장 사업에 따라 10월까지 천안에 두정, 직산, 성환, 천안 4개 역사가 잇따라 들어선다. 게다가 행정수도 이전 논의까지 가세해 이름대로 편안했던 천안은 요즘 흥분 상태다. 삼남대로가 지난다는 교통 요지의 명성을 되찾는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고 유관순과 독립기념관밖에 내세울 게 없었던 고장이 수도권 신도시가 되는 것처럼 들떠 있다.***개발의 꿈에 부푼 도시
"땅 값 오른다는 기대가 크지요." 1995년 천안군과 통합하기 전의 천안시 서부 쌍용동 지역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최계호(52)씨의 말이다. 쌍용동과 인근 신방지구는 최근 4, 5년 사이 40여 단지에 3만 가구가 넘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조금씩의 부침은 있지만 최근 수년 간 이 지역을 비롯한 천안 일대의 부동산 가격은 매년 5∼10% 가량은 올랐다. 실현되지 않은 이익이지만 어쨌든 땅이든 집이든 가진 사람이 적잖은 이득을 볼 형세다.
천안에는 그래서 사람이 몰린다. 인근 아산에서 오고, 경기 평택에서도 온다. 심지어 대전 사람들까지 개발에 대한 기대를 품고 천안으로 터전을 옮기고 있다. 10년 만에 인구가 15만명이나 늘어 구(區)를 둘 수 있다는 50만명이 멀지 않았다.
대전에서 2년 전 이사 와 식당을 하고 있는 김호영(49·여)씨는 "처음 올 때 시골 같던 천안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대전만 해도 정체된 느낌인데 여기는 활력이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평택에서 온 이예순(41·여)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평택이나 천안이나 그게 그거였다. 지금 평택에는 뉴코아 백화점 하나만 있지만 천안에는 갤러리아 백화점에 이마트, 까르푸, 메가마트 등 대형 유통점만 6, 7곳"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교육·문화 도시로 새로날까
동국여지승람이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오룡쟁주(五龍爭珠)'의 형세라고 했지만 천안이 이런 지세 값을 제대로 해본 적은 별로 없다. 능수버들 늘어진 천안삼거리가 대변하는 교통 요충지라는 이미지가 그나마 자랑거리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명성처럼 1번 국도가 지나가긴 하지만 몇 년 전까지 도로 포장 상태가 엉망이어서 버스가 덜컹거리는 것을 보면 천안 온 줄 안다는 말도 있었다. 적당히 들판이 펼쳐져 있고 큰 가뭄이나 홍수가 없는 자연 혜택에 안주해 온 곳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1시간 남짓한, 수도권 인접 외곽 도시라는 지리적 이점을 업고 2년 사이에 천안대로, 새천안번영로 등 왕복 8차선 길이 잇따라 새로 생기는 등 역동적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돼 가는 모양새가 꼭 일산이나 성남 같다. 신흥 번화가인 버스 터미널 인근 신부동 대로변에는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자리 잡고,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조잡한 음식점 간판이 줄줄이 나붙어 있다.
그렇다고 천안이 그저 수도권 신도시를 베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부동 거리는 미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 지역 재력가 김창일(52)씨의 노력으로 마치 현대 조각 전시장처럼 바뀌고 있다. 야외에 늘어선 대형 조각품은 물론이고, 백화점이나 상가로 개발하면 큰 돈이 되고도 남을 땅에 지난해 12월 김씨가 개관한 '아라리오 갤러리'도 명물이다. 5층 건물의 3개 층을 전시장으로 쓰는 이 화랑은 민간 화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신도시는 물론 서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다.
천안이 불과 10년 사이에 전국 최대 규모의 대학 도시가 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안서동에만 단국대 상명대 호서대 천안 캠퍼스, 천안대와 천안외국어대 등 5개 대학이 몰려 있다. 한국기술대 선문대 남서울대 나사렛대 천안대 천안공업대 연암축산원예대까지 더하면 대학이 12개, 학생은 6만명을 헤아린다. 김성렬(63) 천안향토사연구소장은 "교육하면 공주였지 천안은 불모지였다"면서 최근의 변화를 계기로 천안이 충남을 대표하는 교육문화 도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했다.
면면이 이어지는 저항 정신
일제 시절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단체 기관지로 창간된 신한민보의 1919년 9월2일자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지난 4월경에 텬안군(퉁 남도) 병쳔시에서 쟈날을 리용하여 시위운동이 잇엇다함은 이미 보도한 바…당초에 독립시위운동이 니러날 때에 김구응, 박죵만 량씨 쥬모하에 슈천여명의 군 이 맹렬한 시위운동을 행할셰…'
문물이나 인심을 통틀어 천안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저항'이다. 천안이란 이름부터가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끝까지 항거한 이 지역 백제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천하대안(天下大安)'의 의지를 담아 지은 것이다. 오죽했으면 고려 초기 성(姓)을 나눠주면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가축 이름을 딴 오축성(五蓄姓)을 내렸을까. 유관순 열사나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인 이동녕 선생 등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편치 않은 나라를 보고 숨죽이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김성렬 향토사연구소장은 "일제 초기 일본인들이 전국의 계급 분포를 조사한 결과 양반이 평균 3∼5%였지만 천안, 목천, 직산은 10%였다"며 "천안 사람들의 가슴엔 백제 유민의 저항 정신은 물론 선비의 지조가 면면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천안시는 최근 유관순 열사 생가와 추모각이 있는 병천리 일대 도로를 '유관순로'라고 이름 짓고 이 지역을 문화 교육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 삼성전자, LG산전 등 대기업 공장을 성공리에 유치한 데다 철도·도로망 확충으로 꿈에 부푼 한편으로 천안은 독립기념관 건립 때 그랬듯 선조들의 지절(志節)을 되살린다는 뿌듯한 감회에 젖어 있다.
/글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사진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배농사 장덕룡씨
"성환배는 재배 면적으로는 상주보다도 적지만 생산량으로는 국내 최고지요."
천안 성환읍 대일농원의 장덕룡(54·사진)씨는 천안 특산물 가운데 배를 으뜸으로 꼽는다. 1910년대 일본인들이 배나무를 심은 뒤 생산이 시작됐으니 주산 과일이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신고 배는 다른 지역 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달다는 게 장씨의 자랑이다.
선친에 이어 배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특히 농법 개발과 마케팅에서 이 지역 농가를 선도하고 있다. 1997년부터 농학 교수들과 배 농가가 손잡아 22명으로 구성한 '천안 배 연구회'는 농법 개발을 위한 산학 협동의 대표적 사례다.
지금은 다들 따라 하고 있지만 수확 철에 관계 없이 배를 공급할 수 있는 저온 창고나 콩기름을 발라 신문지 잉크가 묻지 않게 한 배 종이 개발도 이 지역에서는 그가 선발 주자이다. 천안시가 삼성·LG 등 대기업 공장 유치로 경제를 활성화하고 있는 것과 나란히 옛날 군 지역이던 주변 농촌은 이런 특산 작물 개발로 천안 경제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농사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거봉 포도가 물밀 듯 밀려들면 배 농사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천안 거봉 농사는 칠레산 수입 거봉과는 나오는 철이 다른 데다 수입 포도에 사람들의 입맛이 적응하면 오히려 수요가 늘어 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배를 찾는 사람들은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과일 값도 갈수록 떨어져 몇 년 전까지 연 소득이 1억원을 넘었지만 지금은 3,000만∼4,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농산물 개방 폭이 더 커지면 과수 농가는 5%의 상류 소비층을 대상으로 고급 과일을 생산하는 5% 정도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주변의 다른 배 농가도 대를 이어 농사를 짓지는 않겠다는 집이 태반이다.
"10년 사이 재배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나는 등 성환 배 농사는 그야말로 호황이었지만 이제 감소 추세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선진 농법이나 특별한 마케팅 기법 없이는 버텨내기 힘들겠지요." 대처로 나가 공부하고 있지만 사회 생활 경험만 해본 뒤 아버지의 농사를 잇겠다는 자식들이 그에겐 지금 재배하는 900그루의 배나무 못지않게 큰 힘이다.
/글 김범수기자 사진 고영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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