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8일 밤 1시간5분 동안 역설한 연두 국정연설의 화두는 전쟁이었다. 부시가 세탁물의 긴 목록을 적어가듯 세금감면과 노인 의료혜택, 낙태 및 인간복제 금지, 수소 동력 자동차와 에이즈 기금을 열거했을 때만 해도 미국의 국민들은 2004년 대선을 떠올렸을 것이다. 초반의 연설은 잘 짜여진 공약 시리즈였다. 1991년 걸프 전에서 승리하고도 재선에 실패한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의 쓰라린 교훈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각각의 정책에 수 억∼수천 억 달러의 자금을 배정했다. "경제 회생이 국정의 제일 목표"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때 그는 재선의 영광을 기다리는 '평시(平時) 대통령'의 모습 그대로였다.그러나 이라크라는 단어가 상·하 합동 회의장을 맴돌면서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낮은 목소리와 엄숙한 표정으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고문과 학살, 대량살상무기 은닉을 얘기하는 동안 그는 이미 '전시(戰時) 대통령'으로 변해 있었다."후세인의 제정신과 자제를 믿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전쟁 의지를 세우는 그의 결기에 청중은 기립박수의 타이밍마저 놓치고 있었다. 부시는 이날 9·11 희생자를 위해 비워둔 자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이래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미군 병사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걸프 지역에 파견된 미군을 향해 "결전의 시간에 미국의 대의는 여러분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확실한 이라크 공격의 명분과 증거를 요구하는 미국 안팎의 반대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한 평론가는 "부시의 연설은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지지자를 위한 일방적 메시지였을 뿐"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나 홀로'대외정책이라는 에드워드 케네디(민주) 상원의원의 지적과 같은 반전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부시의 일방적 독선에 세계는 다시 얼마나 요동치게 될까.
김승일 워싱턴 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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