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러시아는 시장개혁의 대명사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소위 '충격요법'을 통해 급진적 시장개혁을 실시했다. 국유 기업들이 사유화됐고 가격은 자유화되어 물가가 폭등했다. 이런 급격한 시장개혁은 자본주의로 가는 지름길인양 합리화되었고 낙관적 분위기는 팽배했다. 그러나 이는 몇몇 과점 세력이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에너지, 통신, 언론 등을 지배하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결국 옐친은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줘야 했다. 푸틴 하의 러시아는 왜곡된 서구식 자본주의를 러시아 상황에 맞는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혼란을 겪게 됐다. 이 과정에서 국가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 과거의 국가주의로 회귀하는 것과 혼동되었고, 의회에 대한 대통령의 영향력 강화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비쳐졌다.
이런 러시아의 모습을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희생으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입장에서는 러시아적 제도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는 정돈기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러시아의 개혁추진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리 급진적인 개혁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시간적 환경에 의해 변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혁은 보수적인 입장에서의 반동적 저항뿐 아니라 다양한 입장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예기치 못했던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조건은 혼돈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조직된 정치세력과 지식인의 존재 여부다.
러시아의 경우 조직된 세력으로 공산당이 있었지만, 입으로만 개혁의 부작용을 지적했을 뿐 정치적으로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지식인들 역시 이론적 예측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 역시 지난 5년 간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하에 서구식 제도· 정책을 도입하는 개혁을 실시해 왔고, 외환위기 이후의 위기상황은 이런 서구식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저항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두산중공업 해고노동자 분신 사건은 개인적 희생의 차원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무리한 공기업 민영화와 높아진 노동유연성의 상황에서 사용자측이 제기한 불법노동쟁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노동자들을 외환위기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노동 환경 속에 던진 것이었다.
이 사건은 지난 5년 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도입된 서구식 제도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예고편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드러나고 있는 갈등이나 저항을 단순히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향후 개혁은 지난 개혁의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한국적 토양에 맞는 제도의 재창출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선 현 사태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대안 제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지적 인프라가 러시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가장 큰 정치조직으로서의 야당이 과연 러시아 공산당(현 야당)의 우를 피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도 역시, 향후 개혁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비전을 주지 못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개혁의 당위성만이 차기 정부에 위임된 상황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개혁안만이 강요될 때, 지난 5년 간의 개혁이 가져오게 될 저항과 함께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개혁의 동력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적 인프라의 부족과 이를 실행할 정치 세력의 부재로 러시아적 제도 창출에 혼란을 겪었던 러시아의 전철을 우리가 피할 수 있을지는 오직 시간이 말해줄 뿐이다.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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