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는 여름 휴가를 다녀오다가 빗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빠도 보조다리를 했다. 아빠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가며 약국을 계속 운영했다. 명지는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으나, 같은 처지의 아빠에게 의존하며 사춘기를 힘겹게 넘겼다.대학 입학식 날, 부녀는 서로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식이 끝나고 나오다가 위급한 상황을 목격했다. 어린애가 차도로 뛰어들고 있었다.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빠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이를 구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명지야,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아빠는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분이야. 너 혼자 아프게 해선 안 된다고 사 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성한 몸으로는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없다고."
'연탄길'에 실린 이야기다. 학원과 야학의 교사인 이철환씨가 수집한 보통 사람들의 눈물겹고 감동적인 실화들이 세 권에 실려 있다. 2년 전부터 '괭이부리말 아이들'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인천 변두리 빈민가를 배경으로 불우한 아이들이 서로 도와가며 성장해 가는, 아프고 쓸쓸한 이야기를 담은 소년소설이다. 스산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따스하고 아름답다. 저자 김중미씨 또한 그 동네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연탄길'과 '괭이부리말…'의 두 작가는 평범하고 가난한 이웃들에서 감동적인 소재를 찾아냈다. 이 책들은 TV의 힘에 의해 베스트셀러가 되기 시작했다. 경박하다는 비판도 받지만 TV 책 소개프로가 이런 책에 관심을 가졌고, 많은 독자가 이에 호응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1만 달러 소득을 자랑하며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이느냐가 시대의 급선무인 양, 허세 부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과 허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러 가정에서 '연탄길'과 '괭이부리말…'을 읽는다. 부모와 아이가 돌아가며 읽고 눈시울을 붉힌다. 눈물은 메마른 시대를 적셔주고, 현실을 헤쳐나갈 사랑과 힘이 된다. 이 책들의 높은 문학적 작품성과 완성도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소박한 단계의 문학일 수도 있고, 문학으로 완성되기 전의 소재에 그칠 수도 있다. TV '느낌표 현상'을 보며 얘기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인간적 체취와 감동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도 노벨문학상 발표 무렵이 되면 출판계와 독서시장이 기대와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수상작이 앞 다퉈 번역되었고, 요즘 '느낌표' 프로에서 그렇게 하듯이 으레 수상작을 안 읽으면 교양인 취급을 하지 않는, 약간 허영심도 섞인 지성적 분위기가 있었다. 80년대 들어 국내 출판계가 노벨문학상을 의도적으로 저평가하면서 독서 열기도 함께 식어갔다. 다시 90년대 들어 문학이 서사성과 사회성을 팽개치고, 성(性)과 욕망 등의 인간 내면으로 방향을 선회한 후 문학에서 감동도 사라져 버렸다.
'연탄길'과 '괭이부리말…'의 베스트 셀러화는 문학에서 인간미와 감동, 서사성, 사회성의 회복을 요구하는 독자대중의 외침 같다. 지금 문학적 토양은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적 환경에 비해 척박하다. 그것은 대중사회의 보편적 추세이기는 하다. 하지만 바람직한 경향은 아니다. 문학의 편식이 지나치고 기근현상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다. 화제작이나 문제작을 들어본 지도 오래다. 엄숙주의 문학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이 부박해 지는 것은 더 걱정스럽다.
신춘문예를 통해 새 문인들이 대거 탄생하는 철이다. 기존 경향에 물들지 않은 신인들의 참신한 감수성과 빛나는 개성이 우리 문학에 새 에너지를 불어 넣었으면 한다. 겉 늙어가는 우리 문학에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오기 바란다.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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