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날이면, 항상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럴려면 지난 여름에 이미 준비해야 하는 일인데 그렇지 못했으니 이번 겨울에도 이루지 못할 소망이지만…. 제가 살아가면서 과연 그러한 특별한 감동을 누릴 기회가 있을까 의문이 남기도 합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시죠?몇 년 전 충청도의 작은 사찰에 계신 스님 한 분을 뵈었습니다. 백련(白蓮), 즉 흰색의 꽃을 피우는 연꽃을 키우고 계셨습니다. 늘어난 연뿌리를 주변에 나누어주는 일도 스님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백련은 탐스럽게 핀 꽃송이의 미려함이 그 어느 꽃에 비기기 어려울 만큼 곱기도 하지만 꽃 한 송이가 풀어내어 놓은 꽃향기의 그윽함과 풍부함은 숱한 꽃을 보며 살아가는 제게도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덮여버리는 날이면, 스님께서 마음 닿는 가까운 몇 사람을 초대하신답니다. 일어서면 천장이 닿고 바로 눕지도 못할 그 단촐한 산사의 방 한 가운데 적당한 온도의 찻물이 담긴 커다란 오지 그릇에 지난 여름의 절정에 피었던 백련 한 송이가 찻잎과 함께 포개져 다시 계절을 거슬러 피어납니다. 뜨거운 물 위에 띄워진 백련은 다시 한번 차례 차례 꽃잎을 펼쳐내고 그 향기는 온 방안을 진동합니다. 연향(蓮香)을 가득 담은 찻물이 녹아내리고 그 차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맑은 마음이 있고 문밖에는 여전히 소리없는 눈이 내립니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스님께서 1년에 딱 한번 누리신다는 호사에 초대되고 싶으시죠.
연꽃은 불가의 꽃으로 유명합니다만 식물학자들에겐 씨앗의 신비를 보여준 식물입니다. 일반적인 풀씨는 씨앗이 맺힌 지 한 해가 지나면 싹 트는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 야생식물을 잘 키우려면 씨앗을 얻자마자 계절에 관계없이 뿌려야 합니다. 물론 식물마다 다르고 조건에 따라 오래가기도 하지만 가장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었던 씨앗은 바로 연꽃입니다.
대부분의 수생식물들은 물을 벗어나면 씨앗의 껍질이 그 어떤 건조와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해집니다. 동경 부근의 한 늪에서 신석기 시대로 생각되는 카누 안에서 3개의 연꽃 종자가 발견되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중에서 2개를 싹틔워 지금의 연꽃과 조금도 다름없는 분홍색 연꽃을 피워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2,000년을 살아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연꽃 씨앗의 그 놀라운 세상을. 식물이란 이렇게 따뜻함으로 때론 놀라움으로, 한겨울에서 다시 한여름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정말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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