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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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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입력
2003.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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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권 풀어 씀 사계절 발행·1만2,000원16세기 조선에 미암 유희춘(1513∼1577)이란 양반이 살았다. 전라도 해남 출신의 중소지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전라감사,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까지 벼슬을 지내고 62세에 은퇴해 한가롭게 살다 죽었다. 그에겐 교양과 재주가 뛰어난 아내 송덕봉과 1남 1녀가 있었고, 고향 해남의 첩에게서 난 세 딸도 있었다.

유희춘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하면 별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인간적 체취며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암 일기'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만한 기록이다. 미암이 54세 되던 1567년부터 죽기까지 약 11년에 걸쳐 거의 매일 한문으로 써 내려간 일기는 그가 아내와 자식들, 일가 친척, 집안의 수많은 노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체로 생생히 전하고 있어 16세기 양반의 생활상을 눈 앞에 펼쳐 준다.

일기 10책과 미암과 부인 송덕봉의 시문을 모은 부록 1책으로 이뤄진 일기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도 커서 '선조실록' 편찬에 중요한 참고가 됐다.

국문학 전공자 정창권(고려대 한국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씨가 쓴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는 미암일기를 토대로 당시 양반 가정의 생활상을 복원한 책이다. 관직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 등으로 주제를 갈라 각 주제에 어울리는 장면을 골라낸 뒤 먼저 역사적 설명을 하고 해당 장면을 소설처럼 묘사하는 방식으로 썼다.

미암은 조정의 정사부터 집안 대소사와 신변 잡기에 이르기까지 일기에 두루 적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미암이 결혼 후 아내의 친정이 있는 담양에 머물면서 해남 본가를 오가며 살았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조선은 흔히 성리학적 질서에 따른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로 알려져 있지만, 미암이 살던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의 권리와 의무가 동등해서 오히려 결혼하면 남자가 아내의 친정에서 사는 게 보편적이었다.

집안 안주인의 권한도 세서 미암이 아내에게 혼나는 얘기도 나온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꼈던 미암은 더러 바람을 피웠던 모양인데, 한 번은 '서너 달 동안 일체 여색을 멀리 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가 빈축만 샀다. '그게 무슨 자랑이냐, 자랑으로 치면 담양에서 집을 돌봐 온 내 공이 더 크다'고 된통 꾸짖는 내용이다.

미암은 여색을 멀리 했다는 자랑이 무색하게 이 편지를 쓴 지 얼마 안 돼 성병인 임질에 걸려 고생을 한다. 당시 미암은 57세로 전라감사가 되어 집을 떠나 있었는데, 아내가 보고 싶어 잠시 담양에 갔다가 아내에게 병을 옮긴다. 그런데 미암 자신이 의원에게 설명한 임질의 이유가 가관이다. 오랫 동안 오줌을 못 누고 참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의원도 '과연 그렇다'고 했다니, 이게 혹시 남성으로서 동지의식의 발로는 아니었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반면 추운 겨울날 대궐에서 며칠 째 숙직하는 남편을 위해 옷이며 이불을 싸서 보내고, 그걸 받은 미암이 임금이 내린 술과 함께 아내에게 다정한 시를 써보내는 등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미암의 아내 송덕봉이 살림을 주관하면서 틈 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모습도 재미있다. 덕봉은 매달 한 두 번씩 부녀 모임을 가졌고 임금의 어가 행렬 등 특별한 구경거리가 있는 날에는 매번 나가서 구경을 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바깥 출입이 자유로웠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미암은 무척 꼼꼼했던 모양이다. 관리로 일하면서 받은 급여 내역이며 집안의 수입·지출 항목, 남에게서 받은 선물 목록까지 일일이 기록했다. 급여로 3개월마다 받은 쌀 13섬, 보리 1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 임금 하사품으로 받은 노루 한 마리, 말린 꿩 네 마리, 말린 새우 4두름 등등을 꼬치꼬치 적었다. 홍문관에 첫 출근 하던 날, 꼭두새벽부터 노비들의 시중을 받아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이며 날이 밝기도 전에 광화문 앞에서 대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풍경 등도 그림처럼 생생하다.

마치 식물 세포를 관찰하듯 이 책은 미암의 개인일기를 통해 당시 시대상의 단면을 그리고 있다. 400년 전 한 인물이 일기에 적어둔 자잘하고 극히 일상적인 삶의 편린을 엮어 세밀하게 되살려낸 지은이의 노력을 높이 살 만하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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