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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5)金佐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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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5)金佐鎭

입력
2003.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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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24일 중국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독립운동가 김좌진이 암살됐다. 41세였다. 간난의 항일무장투쟁사를 하나의 성좌에 비긴다면 그 성좌를 수놓은 많은 별들 중 김좌진이라는 이름은 가장 밝은 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그 별은 1920년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다.김좌진의 호는 백야(白冶)다. 충남 홍성의 명문 대가 출신이다. 그는 15세에 가노(家奴)를 해방했을 만큼 이미 소년기 때부터 진취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백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에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력과 문화 양방향에서 국권회복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합방 이전까지 백야의 국권회복 운동은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학교를 세우고 언론 활동을 펼치는 등 문화운동의 형태를 취했다. 합방 이후 그의 운동은 무장 투쟁 쪽으로 길을 텄다. 1911년 군자금을 모았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6개월간 복역한 백야는 중국 동북 지방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 무장투쟁의 근간은 그가 총사령관을 맡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였다. 북로군정서는 1919년 3·1운동 직후 대종교(大倧敎) 교인들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 왕칭현(汪城顯)에서 출범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그 해 12월에 개편한 항일 독립군 부대다. 백야는 중국으로 망명한 직후 단군 숭배를 기초로 삼는 대종교에 귀의한 상태였다.

1920년 9월10일부터 12일까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에서 백야가 이끄는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 2,500명은 일본군 5만명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사흘간의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3,300명에 이르렀으나, 아군 전사자는 100명이 채 안되었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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