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로 '악의 축(Axis of Evil)'발언이 나온 지 1년이 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연두교서에서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세계는 대립과 갈등의 격랑에 휩싸여있다.그러나 미국의 압박과 악의 축 국가들의 반발이라는 분쟁의 이면에는 새로운 질서의 모색이라는 측면도 있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의 엄청난 충격 속에서 안보와 국익을 확고하게 보장할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시도했고, 그 극적인 표현이 악의 축 선언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임박한 이라크 전쟁, 북한 핵 문제 등 국제정세를 불안정하게 하는 현안들이 어떻게 정리되느냐 이다. 그 향배에 따라 21세기가 전쟁의 시대가 될지, 평화의 시대가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올해 연두교서도 기조 유지
부시 대통령은 28일 발표할 올해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 발언으로 상징되는 국익우선주의, 일방주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힐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 등 미 언론들은 백악관 관리들의 말을 인용,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에 어떤 후회도 하지 않고 있으며 대외정책 기조의 유지를 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문제를 특히 강조할 전망이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유엔 이라크 무기사찰단의 사찰시한 연장 요청을 반박하는 등 압박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적 연설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플라이셔 대변인은 "구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옳았다"며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의 취지를 재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화한 선제공격 전략
지난해 9월 부시 행정부는 선제공격을 핵심으로 하는 새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다. 대 테러전을 염두에 둔 선제공격 전략은 악의 축 규정과 동전의 앞뒤를 이룬다. 테러는 가시적 전장에서 정규군간 대결이 특징이었던 기존의 전쟁과 달리 사전감지와 보복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테러를 막기 위해서는 테러세력의 본거지와 테러 지원세력을 사전에 분쇄하는 선제공격이 필수적이라는 전략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테러지원국이자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받아온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심화하는 일방주의 노선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다자간 협약보다는 국익을 우선하는 일방주의 경향을 보였다. 유엔 기후협약에 관한 교토의정서 거부(2001년 3월 27일), 생물무기협약(BTWC)에 관한 검증의정서 거부(7월 25일), 1972년 소련과 체결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 탈퇴선언(12월 13일) 등이 그 예다.
악의 축 규정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는 더욱 노골화했다. 지난해 4월 19일 유엔 기후변화 정부간 위원회(IPCC) 의장 선거에서 당시 의장이던 로버트 왓슨이 낙선한 것은 미국의 반대 때문으로 해석된다. 왓슨이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환경정책을 비판해온 환경론자였기 때문이다.
4월 22일에는 이라크의 국제화학무기금지기구(OPCW) 회원국 가입을 추진해온 주세 부스타니 OPCW 사무총장을 축출시켰다. 미국은 또 5월 6일 대량학살과 전쟁범죄 등을 다룰 상설법정인 국제형사재판소(ICC) 창설을 위한 로마조약에 대한 서명을 폐기했다. 나아가 미국은 미군 관련 범죄는 ICC에서 다루지 못하도록 하는 예외규정을 강요하고 있다.
11월 3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예멘에서 무인정찰기 프레데터로 미사일을 발사, 알 카에다 요원 용의자 6명을 폭사시켰다. 예멘 정부의 사전 승인이 있었지만, 테러 용의만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2월 10일에는 예멘으로 스커드 미사일 수출을 하던 북한 화물선 서산호를 인도양에서 나포했다가 예멘 정부가 항의하자 풀어주었다.
미국의 독주 언제까지
아프간 전쟁까지만 해도 지지를 얻었던 미국은 이라크와 북한 문제에서는 상당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은 체첸 반군 테러로 골치를 앓던 러시아와 신장(新疆) 위구르족의 분리독립을 지원하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의 경우에는 아랍 각국이 전쟁을 반대하고 있고 독일, 프랑스 등 일부 우방국들조차 비판을 하고 있다. 북한 문제에서도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은근한 견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와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일방주의, 국익우선주의가 미국의 패권을 확고하게 해줄지, 아니면 국력의 소모를 초래해 미국을 쇠퇴시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은 미국의 지도력을 뒷받침해왔던 도덕성과 정당성을 약화시킬 것은 분명한 듯하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美 외교에 되레 짐" 비판 확산
외교적 수사(修辭)로서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부담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년 전 이 발언이 나온 이후 9·11 테러사건으로 조성됐던 미국지지의 국제여론이 순식간에 바뀌었고, 북한의 핵 위협이 돌출하는 등 외교적 위험이 더욱 증폭됐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제창했던 테러와의 전쟁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유럽국가들이 이 발언 이후 본격화한 미국 일방주의에 반발해 등을 돌리고 있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시련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반테러 의지를 천명하고 그 기조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발언이었다는 긍정론이 많지만, 혹독한 비판도 적지 않는 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최근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1년을 조명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이 발언이 미국인들을 솔깃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외교적으로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 발언이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켜 결과적으로 외교적 손실을 유발했다" 고 덧붙였다.
그레이엄 앨리슨 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학장은 "개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모두 유해한 말이었다"며 "각국의 반응과 북한 핵 사태의 돌출을 고려할 때 이 발언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또 전문가들의 시각을 인용, "부시의 발언이 이란의 온건파 지도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이란 내에서 움트고 있던 민주화운동을 짓밟는 구실을 했으며, 북한을 핵 대립으로 몰아가는데 기여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호주 일간지 오스트레일리언은 22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 국가로 몰아 북한의 핵 프로그램 중단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방해받고 있다"는 북한 관리의 말을 보도, 부시 정권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를 무장해제시킨 뒤 자신들을 붕괴시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리처드 베트 뉴욕 컬럼비아대 전쟁·평화연구소 소장은 "부시 행정부가 이른바 '불량국가'들에 의한 위험에 대해 오랫동안 대비해 왔다"며 '악의 축'발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또 "북한 핵 위협에 관한 모든 비난을 부시의 서툰 화법에만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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