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해질 무렵 찾은 다운재(茶雲齋)는 따뜻했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시인들은 "산골마을의 가게인 줄 알았는데 시내 한복판에 깔끔하게 차린 찻집"이라며 놀랐다."진열된 다기는 기념으로 하나씩 주는 거냐"는 농담도 들렸다.울산 남구 삼산동에 자리잡은 다운재는 시인 정일근(44)씨가 최근 문을 연 전통찻집이다. 18일 저녁 이곳에 모인 시인들에게 개점을 축하하러 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걸 핑계로 놀기 위해서"라며 박장대소한다. "전국 곳곳의 동인들이 시간을 내서 모임을 갖고 정을 다지는 것"이라던 고운기(42)씨의 귀띔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5시간 넘게 달려 온 고씨와 박형준(37) 김춘식(37) 문태준(33)씨, 김포에서 비행기로 날아 온 박철(43)씨, 대전의 김백겸(50)씨, 공주의 양애경(47)씨, 전주의 안도현(42)씨, 광주의 나희덕(37)씨 등 전국 각지의 시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금 늦게 부산의 최영철(47)씨도 합류했다. 밤새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얘기를 나눴다. '시힘' 동인의 2003년 첫 활동이다.
한국 문단에서 '시힘' 동인은 소중하다. 문학 동인의 힘이 과거에 비해 크게 쇠퇴한 게 현실이다. 길어야 5년이 한계 수명이고, 이름만 남은 '개점 휴업' 상태인 최근의 동인 활동에 비해 시힘은 탄탄한 유대와 알찬 시적 성취를 자랑하며 20년 가까이 이름을 키워 왔다. 수년 전만 해도 "소수의 큰 시인들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고 있는 뛰어난 군소 시인들"(문학평론가 남진우)이라는 평을 들었던 이들이 이제 한국 시단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부터가 그랬다. 1984년 안도현 오태환 고운기 김경미 최문수 김백겸 정일근 최영철 양애경 강태형 박철 고형렬씨 등이 모여 동인 활동을 시작했다. 대부분 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신인들이었다. 서로의 문학적 성과를 짚어 주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합동평가회를 열고 신작시를 발표했다. 1년 뒤 동인시집 창간호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가 나왔다. 창간사는 당시 문단의 현실을 이렇게 짚었다. "한국문학은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 깊은 패배의식에 빠져있는가 하면 강렬한 의식이 문학성으로 채 용해되지 못해 생경한 부분이 다른 한쪽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건강한 삶에 시적 기반을 두고 시의 서정성이 바탕색에 짙게 깔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시힘이 출발할 무렵 '오월시'와 '시운동' 동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힘을 띄운 이유에 대해 고운기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한쪽은 참여라고 하고 한쪽은 순수라고 했다. 한쪽이 통일이라고 하면 한쪽은 해체라고 했다. 단체가 갈라지고 생각이 나뉘었다. 이를 극복하는 문학이 절실하게 요구됐다."
중도의 길은 결속력을 흐릴 수도 있었지만 시힘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끈질긴 활동의 원동력이 됐다. 평론가 유성호씨는 "사상적·방법적 동질성이 비교적 약하지만 구성원들의 독자적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시힘을 여느 동인과 질적으로 구별하는 변별적 힘"이라고 설명한다. 동인 박형준씨는 "동인으로 묶였다고 해도 소속감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개인의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힘"이라고 부연했다.
동인지가 사라져 가는 90년대에 시힘은 세대 교체를 통해 더 크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 이윤학 나희덕 박형준 김수영 이병률 이대흠 김선우 문태준씨 등 30대 시인들이, 40대가 된 1기 동인의 뒤를 이어 시힘의 2기 동인이 됐다. 평론가 김춘식씨가 2002년 동인지에 시를 발표하며 합류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고운기씨는 "동인들은 시힘이라는 이름 아래 활동하기보다 문학적 역량을 개인적으로 표출하고 인간적 친분을 나누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울산에서의 새해 첫 모임처럼 동인들이 서로 축하해 줄 자리가 있으면 달려가 얼굴을 맞대고 시와 삶을 얘기한다. 지난해 박형준씨가 동서문학상을, 나희덕씨가 현대문학상을 수상해 함께 기쁨을 나누었듯 서로 북돋워 주며 시적 교감을 한다.
동인지 발간은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이다. 시힘은 10권의 동인시집을 펴냈으며, 지난해 5월 무크지로 전환한 열한번째 동인지 '햇볕에 날개를 말리다'를 냈다. 4월에는 열두번째 동인지를 낼 예정이라고 이날 모인 2기 동인들이 밝혔다.
저녁에 시 낭송회가 열렸다. 나희덕씨가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로 시작되는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낭송했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쓴 시다. 서툴지만 순수한 열정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처음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시힘의 진정한 힘이다.
/울산=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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