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에서 임원들을 내보냈다. '이사진 전원 교체'를 염두에 두고 '중대 결심'을 언급하자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모나미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등재 이사를 모두 교체해서라도 은행 융자를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매출은 어느 정도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불경기 탓인지 자금 순환이 매끄럽지 않아 일시적인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사태 수습 방안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서울 본사와 성수동 공장, 그리고 대전 공장의 임원들이 동시에 은행 대출을 위한 연대보증 입보를 거부하기 위해선 그렇게 하자고 부추긴 주모자가 있을 터였다. 나는 다시 임원들을 한 사람씩 호출했다. 그리곤 입보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표를 낼 것인지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입보를 하겠다는 임원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표를 내겠다고 하는 임원도 없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나는 대전 연필공장 책임자로 있는 상무이사를 다시 호출했다. 서울 지역 임원들과 달리 그는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임원들과의 '결속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최근에 누굴 만났는지, 누가 입보를 거부하자고 했는지 다그치듯 캐물었다.
주모자를 찾아낸다 해도 나는 처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알고 싶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다른 임원들을 선동해 입보 거부라는 단체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대전 연필공장 임원은 계속되는 다그침에 자신은 오늘 아침에야 입보 서류에 날인 서명한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왔으며, 나를 만나기 한 시간 전에 한 임원으로부터 "입보를 하지말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그는 그 임원이 이유를 물어도 얘기해주지 않았고, 모두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하길래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태를 주도한 임원을 제외한 임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입보를 받아냈다. 그리고 '쿠데타'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모나미는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의 경영자는 일당백이 되어야 한다. 모르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고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경영자의 부재는 곧 업무 공백을 뜻한다. 그야말로 경영자가 곧 회사인 셈이다. 중소기업은 그런 경영자들에 의해 지탱돼 왔다. 더구나 문구업처럼 소비재 산업은 경영자의 신속한 판단과 결정이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그 임원의 시각은 달랐던 것 같다. 임원으로서의 권한은 물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상황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중소기업 경영자가 중역 의견을 일일이 물어가며 기업을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나의 그런 소신이 부하 직원들에겐 아집과 독선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은행 대출 건이 마무리된 뒤 입보 거부를 주도한 임원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앞으로 1년간 전권을 줄 테니 한번 모나미를 한단계 더 발전시켜 보라"고 말했다. 나는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묻지도 않고 보고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야말로 1년간 사장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준 것이다. 그러나 1년간 모나미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생산성이 향상되지도, 영업실적이 좋아지지도 않았다. 그 임원은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발전안을 수립·추진했지만 현실은 의욕만으론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1년간 해볼 만 하더냐"고 묻자 그 임원은 죄송하다고만 했다. "사장 자리는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외롭고 고단한 자리요."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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