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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2)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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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2)공포정치

입력
2003.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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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던 1793년 1월21일 파리 혁명 광장,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공포정치(Terreur)가 시동을 걸었다. 루이 16세가 역사의 흐름을 읽을 만큼 명민하지 못했던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프랑스를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었다. 혁명의 초기 지도자들은 절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급격한 이동보다는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원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웃 나라 군주들의 힘으로 혁명을 제압하려는 생각으로 1791년 6월 파리를 탈출해 동부 국경 밖으로 도망하려다 체포됐다. 혁명을 좌절시키려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의 침략이 있은 뒤 프랑스는 1792년 9월 공화정을 수립했고, 국왕은 이듬해 1월 국민공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와 함께 혁명은 과격화의 길로 치달았다.공포정치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다. 국민공회 산하 공안위원회를 중심으로 실시된 공포정치는 국내외 혁명 동조자들의 상당수에게 환멸을 맛보게 했다. 국내 반혁명파의 준동과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네덜란드·스페인 등의 제1차 대불(對佛)동맹이 공포정치에 한 움큼의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 프랑스인들은 누구도 그 해가 자신의 마지막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지닐 수 없었다. 불충분한 증거로 사형을 선고 받는 일은 예사였고, 더러는 재판 없이 단두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파리에서만 하루에 수십 명의 목이 잘렸다. 단두대가 설치된 혁명 광장 주변은 피비린내가 가실 줄 몰랐다. 공안위원회가 설치된 1793년 4월부터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공포정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1794년 7월 사이에 처형된 사람은 2만에 가깝다. 이것은 투옥된 40만 가량의 '혁명의 적' 가운데 옥사한 사람들은 셈하지 않은 숫자다.

고 종 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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