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정책 방향이 대선 1개월이 지나면서 상당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선과정에서 약속한 노 당선자의 핵심정책은 재벌개혁과 자주적 대미관계, 북핵 문제의 주도적 해결, 진보적 노동정책 등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최근 조정과정을 거치면서 한층 유연한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평가다.이는 재벌개혁의 급격한 추진에 따른 반발과 경제적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반미 기류를 조기에 차단, 미국과 공조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다각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인수위 관계자는 "큰 정책기조가 바뀐 것은 없다"며 "다만 경제적 충격과 안보 불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연한 정책조정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북·대미 관계
노 당선자는 지난해 11월 후보단일화 토론회에서 "미국에 굽실굽실할 생각은 없다. 미국에 갔다와야 대통령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며 특유의 대미관(對美觀)을 표출했다. 그는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수평적 대미관계를 강조했다. 북핵 문제에서도 "북한에 압력만 행사하는 건 위험하다"며 대북 강경기조를 비판하고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촛불시위로 인한 미국에서 반한 여론이 일고 주한미군 철수가 거론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 이 같은 기조는 다소 바뀌었다. 새해 들어 노 당선자는 '북한 핵개발 불용', '미국과 성실 협의'를 강조했고 15일 한미연합사령부 방문 때는 혈맹관계를 부각시켰다.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고 반미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 것도 북핵 문제 해결과 경제·안보 위기 예방 의지로 해석된다.
▶재벌정책
노 당선자는 후보 시절 경제위기 원인론까지 내세워 강력한 재벌개혁 의지를 보였다. 투표 전날인 12월18일에는 재벌개혁을 강조했다가 단일화 파기상황까지 초래했다. 인수위원들도 재벌의 구조조정본부 해체와 상호출자·채무보증 전면금지를 주장했다가 재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
그러나 경제불안 심리가 거세지며 이런 기조는 크게 누그러졌다. 노 당선자는 "시장에 급격한 충격을 주는 조치는 없다"고 재계를 안심시켰고 김진표(金振杓) 인수위 부위원장은 "특정재벌을 겨냥한 정책은 없으며 자율·장기·점진적으로 추진한다"고 재확인했다. 따라서 노 당선자의 재벌정책은 직접 규제보다는 점진적 제도개선으로 선회할 공산이 크다.
▶노동정책
노 당선자는 노동변호사의 전력 탓에 친(親)노동자 성향으로 비쳐왔다. 그는 대선 공약에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산별 교섭 정착' 등을 내세웠다. 인수위도 '노사정위원장의 부총리급 격상' 방침을 표명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문제로 노동부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18일 "불가피할 때는 해고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또 "사회적 미합의 사항을 억지로 추진할 생각은 없다",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차근차근 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산별교섭도 공공부문에만 우선 도입키로 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공신들 사이 미묘한 갈등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일등 공신들의 1개월간 성적표는 어떨까.
현재 노 당선자의 주변 실세로 꼽히는 인사들은 민주당 김원기(金元基) 고문과 정대철(鄭大哲) 최고위원, 임채정(林采正) 인수위원장 문희상(文喜相)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 신계륜(申溪輪) 당선자 비서실장 등이다.
김 고문은 당 개혁특위 위원장으로서 노 당선자의 강력한 정치개혁 의지를 원군 삼아 당을 환골탈태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적표를 매기기엔 아직 이르다는 평이 적지 않다. 신주류 내부에서조차 특위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지도부 교체 등을 둘러싼 구주류와의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등 그에게 맡겨져 있는 숙제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정 위원은 대미 특사 자격으로 내달 초 미국을 방문, 조야 인사들을 만나 북핵 해법 등을 포함한 노 당선자의 대미관 알리기에 나설 예정이다. 그는 일본도 방문할 예정이다. 이번 방미·방일 성과가 정 위원의 향후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될 전망이다. 신주류 양대 산맥인 김 고문과 정 위원은 내심 차기 당권을 놓고 신경전도 벌이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임채정 위원장은 대과 없이 정권 인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평이다. 다만, 언론사에 대한 공정위의 과징금 취소 결정을 용인했다가 노 당선자로부터 질책을 받은 점과 KT 계열사 사장 선정과 관련해 정통부 장관에게 전화를 한 점 등은 '흠'으로 지적된다.
신계륜 실장은 총리 등 새 정부 요직 인선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이미 노 당선자에게 총리 후보 면면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노 당선자로부터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제의 받았을 정도로 최측근으로 자리잡았다.
대선 기획단장 출신인 문희상 내정자 역시 노 당선자가 여야간 대화와 협력 관계를 고려, 직접 발탁할 만큼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신 실장과 문 내정자는 아직까지는 크게 충돌한 예가 없지만 일하는 스타일 등에서 차이를 보여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갈등·견제 기류가 흐른다"는 평도 나온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해외 시각도 변화 움직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한 달을 주시해온 미국과 일본의 시각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처음 가졌던 부담감과 불안감이 상당부분 해소됐다는 분위기다.
미국 "한국의 새 대통령을 걱정하면서 잠을 설칠 필요는 없다." 최근 서울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를 인터뷰한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17일자 칼럼 '쿠키와 김치'에서 미국인에게 걱정을 거두라고 일렀다. 미국인들이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한국의 새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민들 속에서 자라고 있는 미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라고 지적했다.
대선 직후만해도 미 언론과 학자들은 노 당선자를 '반미 감정을 등에 업고 당선된 인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노 당선자가 미군 기지 등을 방문,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자 미국 내에서는 그에 대한 우려가 기우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곧 발간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전기를 쓴 마이클 브린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적극적이고 편안해보이는 노 당선자가 김 대통령보다 더 좋은 인상을 워싱턴에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일본 일본 정부와 언론은 노 당선자가 난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해결하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고 보고 있다. 우선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노 당선자가 수시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지난 1993년 북핵 위기와는 달리 한국이 배제되지 않고 처음부터 논의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노 당선자가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문제 해결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밝힌 데 주목하고 있다.
도쿄(東京)의 한 외교소식통은 "대화 단절이 아닌 고이즈미 총리와의 직접 담판을 시도하는 적극적 태도에 일본측이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기류"라고 전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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