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아내와 고향은 동의어인 것 같다. 아내를 처음 사랑할 때는 가슴에서 별이 뜨고 꽃이 피었다. 하지만 해가 뜨면 별은 지고, 철이 가면 꽃도 진다. 열기는 그렇게 지나간다. 설레고 들뜨는 감정이 잦아들면 의무와 관성 같은 딱딱한 말만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뜨겁진 않지만 온기가 꽤 오래 간다.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늙어가면서 천천히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작가 19명의 산문과 사진을 함께 담은 '아내의 고향'(리브가 발행)이 출간됐다. 시인 고재종 최영철 안도현 장석남씨 등과 소설가 이순원 구효서 심상대씨 등이 '아내의 고향'이라는 이미지에서 붙잡은 단상을 글로 옮겼다.
시인 황학주씨가 기획해 1년여 문인들의 원고를 모은 것이다. 사진작가 이상윤씨가 찍은 전남 고흥군 구암리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이들의 아름다운 문장과 썩 잘 어울린다.
'지금도 그녀는 매일 꿈결에 이 길을 걷는다. 나도 함께 걸을 것이다. 그녀는 이 길 위에서만큼은 어린날의 소녀로 돌아가 살며시 내 손을 놓을 것이다.'(이순원 '꽃신 신고 가던 길') 아내도 한때는 소녀였다. 새로 산 꽃신을 신고 마을 가운데 난 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다녔다. 걷고 또 걷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한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소녀는 아내가 됐다. 아내가 언제나 마음 속에 소녀를 품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뒤늦게야 안다. 때로 그 마음 속 소녀를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내의 고향'이라는 말에 시인 고재종씨는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고 누군가 목을 매기도 했던 고향의 느티나무를, 어릴 적 할머니 권사가 애통애통 가슴을 쳐대던 예배당을 떠올린다. 학교 가는 길에 종종 마주쳤던, 월남치마를 두른 긴 머리 동네 여인을 기억하려다 보니 아내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고씨는 "차고 딱딱하고 모나고 녹스는 것뿐인 나날의 내 생의 불모지에 아내는 오늘도 희고 둥근 백합화다. 척박한 골짜기에 핀 백합화는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시인은 아내의 자리에 서 본다. 오래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자리다. 아내는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엉엉 울기도 하면서 야위어갔다. 익숙해진 아내의 가슴이 앙상하게 말라 있는 것을 어느날 본다. 그 속에서 무심한 남편을 향한 애달픈 기다림을 읽고 가슴을 쓸어준다. 이것이 시인의 눈이다. '멀리서 오는 남정네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가냘픈 가지가 되었네. 무심한 바다에 차가워진 남정네들의 마음을 다시 들끓게 하려고 새까맣게 애간장이 탄 야윈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네.' (최영철 '바다로 간 남정네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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