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아라비아의 실권자 압둘라 왕세자가 중동정세에 대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3월 바레인에서 열리는 아랍정상회의를 앞두고 그는 최근 아랍권이 정치·사회적 개혁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아랍헌장' 을 제안했다. 걸프국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그가 개혁을 주창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지난해 그가 내건 중동평화안이 국제여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바 있어 이번 구상에도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헌장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슬람 과격분자의 토양이 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침체를 극복하고 아랍국가 스스로 국가이익과 권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한 방법으로 현대화와 정치참여, 경제통합, 안보동맹 확립 등을 들었다. 정치참여, 민주화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경제적으로는 2005년까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고 아랍공동의 관세동맹을 2010년까지 끝맺자고 하는 등 세부적인 통합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서방국가로부터 관심을 끄는 것은 이라크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미묘한 시점에 아랍의 맹주 사우디가 왜 개혁의 깃발을 들고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9·11 테러 이후 사우디에 끊임없이 개혁을 요구해온 미국의 압력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해줘야 하는 압박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시각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전쟁구도에서 아랍국가들이 걸맞은 위상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 있다. 결국 아랍권 스스로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개혁의 필요성을 빌미로 도발하려는 미국측에 쉽사리 전쟁의 구실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는 게 중론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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