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초 나는 모나미 태국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콕으로 향했다. 공장 설립은 부지를 매입하자마자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태국 정부는 공장 설립과 관련된 모든 행정 절차를 단 한번에 끝내줬다. 이 기관 저 기관 찾아 다니면서 서류를 내고, 갈 때마다 "서류가 잘못 됐다" "서류가 빠졌다"며 퉁명스런 핀잔과 함께 서류를 반려하던 우리나라 사정과는 영 딴판이었다.나는 대전에 있던 연필, 그림물감, 크레파스, 연필심 생산시설을 모두 태국공장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대전 공장은 선물용 고급 볼펜이나 샤프펜슬을 만들어 모나미에 납품하는 하청업체에 임대했다. 고급 문구류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연필이나 물감처럼 원가 절감이 필요한 제품 생산은 인건비가 싼 태국에서 하고 고부가가치 상품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이원 체제를 갖추게 됐다.
방콕에 도착한 나는 직원에게서 며칠 뒤 열릴 준공식에 참석할 주요 인사들의 명단을 받아 점검했다. 준공식에는 합작 파트너인 차이씨의 고교 동창인 태국 육군 참모총장이 참석키로 돼 있었다. 태국은 공산화한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인접해 있어 군부 인사들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차이씨는 "군부 최고위층 인사가 참석한다면 모나미의 앞날은 순탄할 것"이라며 친구의 참석을 추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명단에 태국 주재 한국 대사는 물론 대사관 관계자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태국 육군 참모총장이 오는데 한국 정부 관계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본 직원은 "대사관에 참석을 요청했지만 무반응이었다"고 보고했다. 태국공장 바로 옆에는 인형을 만드는 일본 업체의 공장이 있었는데,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애로사항을 점검했다. 너무 대비되는 우리 대사관의 태도에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준공식이 열린 날 태국 육군 참모총장이 공장에 도착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 정문 쪽에서 태극기를 단 검정색 승용차가 들어왔다. 태국 육군 참모총장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대사관 관계자였다.
모나미 태국공장을 운영하면서 나는 철저히 현지화한 경영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국공장에는 현지인 직원 40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장이 가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슬금슬금 퇴사하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급기야 생산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조사해보니 원인은 단순했다. 공장내에 법당이 없기 때문이었다. 태국은 불교 국가다. 태국인들은 집이든 직장이든 조그만 법당을 세우거나 불상을 모셔놓고 수시로 기도를 드린다. 대부분 공장들은 입구에 법당을 세워 직원들이 출퇴근 할 때마다 무사 기원을 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국인들은 또 단 한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한국인 직원들이 언어 장벽 때문에 가끔 태국인 직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는 즉시 법당을 세웠다. 그리고 태국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한국인 직원들이 태국과 태국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야 태국공장의 한국인과 태국인은 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