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 문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면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의 신년사인 새해 공동사설이 고난의 행군 정신을 정식 언급했고, 평양의 100만 군중집회 등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 지지대회 등도 고난의 행군 정신을 다짐하고 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가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제의 토벌에 쫓기며 남만주 몽강(현 정우)현 남패자에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까지 이동한 것을 말한다. 이 곳은 평상시 같으면 6∼7일 걸리는 거리이지만, 섭씨 영하 40도의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100일 이상을 걸어야 했다. 하루 20여 차례의 교전이 있는 날도 있었고, 밤에 주로 이동했다고 한다. 김일성 우상화에 나오는 얘기여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려운 시기를 의지로 극복하자는 취지임은 분명하다.
■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사망한 뒤 1995년부터 2000년 말까지 6년 동안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극도의 식량난과 마이너스 성장이 말해 주는 경제난 때문이다. 체제붕괴 가능성이 거론되는 총체적 위기 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최대 피해자는 인민들이었다. 북한 지도부와 평양은 건재했지만, 인민들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채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굶어 죽어야 했다. 북한은 2000년 10월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아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당시의 노동신문은 "한 나라, 한 민족의 역사에서나 인류사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시련이었다"고 말했고, 북한의 중앙방송은 "다시 상기하지 않으련다"고 참상을 인정했다.
■ 북한이 고난의 행군 정신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인민들에게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미국의 중유공급이 끊겨 에너지난이 가중되고, 춘궁기가 다가오면 또 다시 굶주림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 카드를 가지고 미국과 벼랑 끝 협상에 나서는 궁극적 목적은 김정일 체제의 지속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인민의 아사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체제 아래 살고 있는 북녘 동포들이 불쌍하기 그지없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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