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하에서 실시된 후 분석·정리되지 못했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본격적 분류·정리 작업을 거쳐 80여년 만에 보고서로 정리돼 나오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관장 지건길)은 2000년 조선총독부 조사·발굴 유적의 정리 사업에 착수, 첫 성과물로 1924년 조사된 경주 노동리 4호분과 1917년 발굴된 황해도 봉산군 초와면 양동리 3, 5호분에 대한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중앙박물관은 내달에는 1933년 조사된 평양 정백리 8호분, 13호분에 대한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조선총독부 등의 주관으로 이뤄진 당시의 발굴작업은 제한된 인력과 예산으로 대부분 수습 작업 차원에서 이뤄져 조사 성과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발굴된 유물은 약 8만점에 이르지만 대부분 미등록 상태로 수장고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관련 자료와 출토 기록이 남아 있는 유물조차도 일부 자취를 감추면서 유물·자료 정리와 보고서 발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중앙박물관은 당시 유물과 자료 등을 검토한 후 분류가 완료된 경주 노동리 4호분과 봉산군 양동리 3, 5호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노동리 4호분 발굴보고서는 1924년 8월 박옥포(朴玉圃)라는 늙은 기생의 집터를 황덕호(黃德浩) 등 경주 양곡상 2명이 매입해 쌀 창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확인된 5∼6세기의 전형적신라 고분인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의 자료를 정리했다. 자료 정리 결과 피장자는 금박과 영락(드림 장식의 하나)으로 장식한 비단옷을 입었고 관모와 여러 가지 옥으로 만든 장식을 화려하게 걸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1917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가 발굴한 봉산 양동리 전실묘(塼室墓)는 같은 해 '다이쇼(大正) 6년 고적조사보고서'에서 이미 전형적 중국계 전축분(塼築墳)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무덤 구조나 출토 유물 등에 대한 구체적 조사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에서는 "서북한 지역에 존속했던 한(漢)의 군현인 대방군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라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관련 연구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유물 실사 작업과 함께 유리 원판 사진과 문서 목록 등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부장품의 경우 정확한 출토위치, 질과 양, 특징 등이 명시돼 있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한 것도 많았다. 또 금속유물은 발굴 당시부터 부식이 심했던 데다 그 동안 산화가 진행돼 특징파악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영훈 고고부장은 "유적조사를 끝내고도 보고서를 내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갈수록 보고서 작성은 어려워진다"며 "1921년 발굴된 후 아직 정식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경주 금관총이나 서봉총 등에 대해서도 곧 보고서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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