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겨울방학이 중반에 들어섰다. 이맘때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답사와 견학 숙제. 마냥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뭔가 머리 속에도 남는 여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싶다. 눈까지도 즐거우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 기이한 풍광과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여행지를 찾아본다. 기념사진을 찍을 카메라를 꼭 준비하자.■고성 상족암
영남 지역의 남쪽 끄트머리 고성(固城), 그곳에서도 가장 남쪽인 하이면 덕명리의 바닷가. 한려수도 국립공원의 중심에 있는 해변이다. 푸른 물과 고깃배의 똑딱거림은 여느 바닷가와 같지만 파도를 맞고 있는 육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세월과 파도만이 만들 수 있는 장관(壯觀)이 그 곳에 있다.
덕명리 해안을 대표하는 것은 거대한 돌출바위. 상족암(床足岩)이라 불린다. 바위 절벽 밑부분이 파도에 깎여 동굴이 됐다. 멀리서 보면 평평한 돌상을 받치고 있는 다리 같다. 그래서 이름이 '상다리 바위'이다. 높이 20m가 족히 넘는 바위는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하다. 수억년에 걸쳐 퇴적된 수성암이다. 땅 속에서 스스로의 무게에 눌리며 단단해진 퇴적층은 지각변동에 의해 땅거죽으로 솟았다가 파도와 만났다.
큰 바위에 굴이 나 있다. 굴은 두세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들어갈 정도로 넓다. 열 십자(十) 모양으로 가운데에서 만났다가 다시 사방으로 헤어진다. 바위 속 교차로는 열명이 둘러 앉아도 될 만큼 널찍하다.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도 있다. 동굴 입구 중 하나는 바로 바다로 드리워져 있다. 용왕이 선녀를 유혹하려 드나들었던 문일까. 비스듬한 바위를 타고 파란 물길이 찰랑댄다.
상족암을 중심으로 서쪽은 너럭바위, 동쪽은 자갈해안이다. 사람들은 주로 서쪽 너럭바위를 찾는다. 물이 완전히 빠지면 1,000명은 족히 올라탄다고 한다. 완만하게 물 속으로 드리워진 이 바위는 여름이면 그대로 해수욕장이 된다. 한반도에서 이렇게 크고 평평한 바위해수욕장은 흔치 않다. 바위 앞 바다 건너편으로 꿈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여인의 가슴을 닮았다는 유방도, 병풍처럼 이어진 병풍바위,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용굴….
수도권에서 멀다는 이유 때문에 아름다움에 비해 다녀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때가 덜 탔다. 그러나 앞으로는 남쪽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될 전망이다. 다름 아닌 공룡 발자국 때문이다.
이곳에는 한반도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공룡발자국이 있다. 수를 센 것만 4,000여 개. 과거 공룡의 낙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발자국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냥 해변의 바위에 널려 있다. 발자국이 찍힌 바위의 모습에 탄복하면서 자세히 들어다 보면 크고 작은 발자국이 혹은 바다로, 혹은 산으로 향하고 있다. 발자국만 따라 해안을 빙 둘러보아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태백 검룡소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 우리가 산소처럼 매일 호흡하는 한강. 하지만 그 발원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 수도권 주민은 몇 명이나 될까.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 태백시(창죽동 금대봉골)에 있다. 이름은 검룡소. 깊은 겨울이지만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새해 여행의 행선지를 강원도 산골로 잡았다면 꼭 들러봄직하다. 매일 대하는 한강의 모습과 의미가 달라진다.
원래는 강원 평창군 오대산의 산샘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로 꼽혔다.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예로부터 유명한 샘이었다. 물맛이 매우 좋고 다른 물과 섞이지 않기 때문에 맑은 빛을 간직한 채 서울까지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양반들은 강가에서 뜬 물을 먹지 않고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나가 깊은 곳으로 흐르는 우통수의 맑은 물을 길어 마셨다고 전해진다. 우통수를 한강의 발원지로 여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길고 짧은 것을 밝혀냈다. 하늘에서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이 근거가 됐다. 지도상의 거리를 측정하고 답사를 해 본 결과 검룡소의 물줄기가 약 32㎞ 더 길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1987년 국립지리원이 한강의 발원지로 공식 인정했다.
검룡소는 큰 길(35번 국도)에서 약 7㎞ 떨어져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비포장과 포장이 섞인 찻길이지만 마지막 1.3㎞는 일반 차량이 다닐 수 없다. 경사가 거의 없는 분위기 좋은 산길이다. 잎이 넓은 산죽밭을 지나고 캄캄할 정도로 하늘을 가린 낙엽송숲을 통과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 길 옆으로 야생화가 지천으로 핀다. 희귀종인 하늘다람쥐도 산다. 그래서 길 옆의 금대봉과 대덕산은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낙엽송 숲의 끝지점에 육각형의 정자가 놓여있고 그 옆에 기념비가 서 있다. '태백의 광명정기 예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하다'라고 쓰여있다. 기념비 뒤로 집채만한 암반이 버티고 있고 그 위에 검룡소가 있다. 한강의 발원지라고 하지만 예상보다 그리 크지 않다. 폭이 약 5m 정도 되는 둥근 샘이다. 크기는 작지만 에너지는 만만치 않다. 하루에 용출하는 물의 양은 평균 2,000∼3,000톤. 비가 잦은 계절에는 5,000톤까지 뿜어낼 때도 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검룡소 샘물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시사철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섭씨 9도를 유지한다. 한여름일지라도 손을 집어넣으면 채 1분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겨울에는 반대이다. 영하 20도 이하로 곤두박질치는 골짜기의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 주변에는 눈이 쌓이지만 샘과 용틀임 폭포 주변은 푸른 이끼가 가득하다. 눈 속에서 헤매던 산짐승들이 물을 마시러 떼지어 찾아온다.
■영월 선돌과 서강
우리 역사상 가장 불운한 삶을 산 군왕을 꼽으라면 단연 조선의 단종이다. 17세의 나이에 다른 사람도 아닌 삼촌 세조에 의해 제거됐다. 그러나 죽어서 가장 행복한 군왕이 있다면 또한 단종일 듯하다. 그가 마지막 생을 보내고 결국 주검이 되어 누워 있는 강원 영월땅은 매년 수백만명의 여행객으로 북적댄다. 그의 무덤인 장릉을 참배하고 유배지인 청령포를 방문한다.
단종의 발자취는 영월의 서강을 따라 흐른다. 꼬불꼬불 요동치는 강물의 모습이 그의 삶을 닮은 것 같다. 서강 여행의 입구는 선돌이다. 선사시대 돌무덤이 아니라 날카롭게 우뚝 서있는 아름다운 바위다. 영월읍으로 들어가는 소나기재 중턱에 있다.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0여m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깎아지른 절벽에 선다. 강물쪽으로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나타난다.
한 개의 바위를 전기톱으로 정교하게 자른 모습이다. 바위 사이로 크게 굽이치는 서강이 내려다 보인다. 한양을 떠나 먼 길을 걸었던 단종은 이곳에서 유배지가 가까와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굳이 넋을 놓아버렸고 이 후 한동안을 쉬었다.
청령포로 자리를 옮긴다. 칼처럼 서슬 퍼런 강물이 앞으로 흐르고 옆과 뒤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움치고 뛸 수 없는 지형 때문에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았다. 그래서 비극의 유배지가 됐다. 청령포를 초생달처럼 감아도는 서강은 영월의 서쪽 언덕을 안고 흘러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동쪽을 흘러내리는 동강과 만나고 남한강으로 불리운다.
청령포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상시 왕복한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집이며 세간들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다. 일단 아름다운 빛깔의 소나무가 빽빽한 모습부터 이채롭다. 산책코스가 있다. 역시 벼랑 위에 오르는 코스의 풍광이 좋다. 서강의 아름다운 물줄기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서강의 아름다움은 동강 못지 않다. 강원도 땅을 흐르는 물길답게 구절양장으로 굽이치며 곳곳에 절경을 만들었다. 1급수의 물에 수달, 비오리, 어름치가 뛰노는 건강한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다. 강을 따라 잘 포장된 도로가 상류까지 이어진다. 영월을 스쳐가면서 강을 바라보면 몸도 마음도 푸른 물 빛에 젖는다. 영월에 들렀다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묘를 빼놓지 말도록. 장승을 세우는 등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
/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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