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미국대선이 부정개표의 촌극 속에 부시대통령의 승리로 끝나자 민주당과 녹색당 지지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공화, 민주 양당을 비판하며 나선 신흥 진보정당인 녹색당이 엘 고어 민주당 후보의 표를 뺏어가 부시대통령을 당선시켰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난을 둘러싼 논쟁이었다.이번 대선도 노무현 당선자가 승리했으니 망정이지 패배했더라면 노 지지자들과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 비슷한 논쟁이 재연됐을 공산이 크다. 권 후보가 이회창 후보보다는 노 후보의 표를 많이 잠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취임도 하기전에 딴죽
그러나 진짜 진보쪽인 권 후보의 출마와 텔레비전 3자 토론은 노 후보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온건하고 보수적인가를, 따라서 그를 급진좌파로 몰아온 일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를 도와준 측면이 적지 않다.
어쨌든 선거가 끝나고 인수위를 중심으로 노 당선자의 집권준비가 가시화하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색깔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한나라당이 노 당선자 팀을 좌파라고 규정하고 나서는가 하면 뉴욕타임스가 노 당선자의 경제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한 전경련 간부의 발언을 인용보도한 것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 때도 색깔론이 심심치 않게 제기된 바 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초기에는 발등에 떨어진 경제위기 문제로 인해 조용했다가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일부 언론이 최장집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의 글을 문제 삼아 색깔론이 시작됐다면, 이번에는 정권 출범도 전에 벌써 시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가 5년 사이에 오히려 후퇴한 셈인데,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노 당선자의 과거 언행 중에 급진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대목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선 본선과정에서 그가 내놓은 공약이나 인수위가 제시하고 있는 정책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즉 노 당선자의 노선은 좌파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개혁적 보수내지 중도우파에 가깝다. 따라서 걱정되는 것은 노무현 노선의 중도우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의 색깔 시비에 휘말려 그나마 개혁적 정책들이 입안초기부터 왜곡되고 좌초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색깔 시비 등에 묻혀 여론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한 최근의 두 사건이다.
하나는 연초에 공안당국이 한총련 의장권한대행을 연행· 구속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두산중공업의 노조탄압과 파업관련 손해배상소송 가압류에 시달리던 노조원 배달호씨가 항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한 것이다.
사상·노동탄압 없어야
단지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소속원이 구속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 행사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도록 강제해 노동자가 분신을 해야 하는 것이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인권대통령하에서의 인권의 현실이자, 한나라당 등이 좌파라고 비판해온 김대중 정권의 인권정책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두 문제는 좌파와는 거리가 먼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 그리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같은 단체들이 앞장서 개선을 촉구해온 반민주적 현실의 소산이다.
이제 좌파니 우파니 하는 잘못된 색깔시비를 넘어 자유민주주의라면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사상의 자유가 지켜지고 시대착오적 노동탄압에 의해 노동자가 분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루어지도록 모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손 호 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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