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은 전후의 황폐한 시대를 오기와 기행으로 살았던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는 과도한 음주로 병을 얻어 1970년 37세로 요절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잊혀지고 말았다. 그는 누항의 궁핍 속에서도 결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 시 중의 하나가 '병상록' 이다.<…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오연함과 눈물겨운 부정(父情)이 교직돼 있는 이 시는 가난한 시인이 모든 이에게 들려준 엄숙한 잠언 같다. 좌절되긴 했으나, 그는 정치적 야망이 큰 시인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만 쓰인 명함을 갖고 다녔고, 4·19 직후에는 서울 용산구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거물 정치인 장면에 참패한 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을 기다리는 공기가 서늘하다. 개혁의 수레를 함께 밀어줄 열기보다는, 북핵 문제가 취임 길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를 시험이라도 하듯 북한은 위험한 핵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미국 보수 언론인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겁을 주고 있다. 재벌의 저항도 만만찮다. 우환들을 보며 김관식의 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대통령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이라고 고쳐 써 본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사유는 냉철하고 언행은 진중해야 하지만, 기가 죽거나 주눅들지는 말아야 한다. 2년 전 고이즈미 일본 총리도 꽤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는 "겁내지 않고, 기죽지 않고, 개혁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며 성역 없는 개혁을 다짐하여 연말 유행어 대상이라는 재미있는 상을 탔다.
'노인 지배'로 불리던 동북아의 정치지형이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남북한·중·일 지도자가 모두 젊어졌다. 김정일(62) 후진타오(61·중국 공산당 총서기) 고이즈미(61) 노무현(57) 순으로 비슷한 연령층을 이루고 있다. 또한 노 당선자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동갑이기도 하다. 노 당선자는 정치외교에서 기죽지 않는 사유와 참신한 감각, 긴 안목을 지닌 지도자로서 당당하게 발언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서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노(盧)가 되어야 한다.
동북아는 한반도와 일본의 비핵화를 근간으로 하여 현상이 유지되고 있다. 북핵 문제는 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합의가 바탕이다. 그러나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북한이 이 틀을 바꿀 의지가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시각에 따라 위협도 되고 호소도 되지만 위험한 것만은 틀림없다.
지도자는 신중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데는 과감해야 한다. 아직 출구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태가 북핵 문제에 대해 좀더 항구적인 해법이 마련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북미 간 불가침조약 체결과 일괄타결 추진 등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이 고려되기를 희망한다.
역사평가는 냉정하다. 주요개혁에도 불구하고 YS가 저평가되는 것은 IMF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미국 후버 대통령도 대공황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 최악처럼 평가된다. 후임자인 루스벨트는 최고로 평가 받는 대통령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공황극복을 위해 동원한 주요정책은 후버 때부터 실시했던 정책이었다. 후버보다 더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추구했을 뿐이다. 루스벨티즘과 뉴딜정책 등은 루스벨트가 취임 때 지니고 있던 청사진은 아니었다.
남북화해와 IMF 상황극복의 공이 있는 DJ도 우환이 끝난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퇴임 후 햇볕정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도와야 한다. 북핵 문제의 해결 없이는 남북화해의 의미도 없다. 한반도가 불안정한 한 전·현직 대통령에게 안락과 휴식은 없다.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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