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해 온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 측 인사들은 재야 시절 자신들이 집권에 성공했을 때 차지하게 될 각종 인사 요인을 그랜저 승용차 숫자에 곧잘 비유하곤 했다. 예를 들면 그랜저 3.0을 타는 자리는 몇 자리나 되고, 2.5를 타는 직책은 몇 개소나 된다는 식이었다.자동차 배기량을 기준으로 성골과 진골, 주역과 조역을 가르는 식별법도 흥미롭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어설픈 관행 아닌 관행이 별 저항 없이 그들 내부에서 수용되더라는 점이다. 당시에는 최고급 국산 승용차가 그랜저였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에쿠스나 체어맨 등 다른 국산 고급 승용차의 브랜드로 바뀌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오랜 야당생활에 찌들대로 찌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숙원은 정권 교체였고, 당시 최고급 승용차인 그랜저는 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분상승의 척도였다. 이런 소망에 부응이라도 하듯, 실제로 양 김 씨는 집권에 성공한 후 야당시절에 고생했던 자기네 사람들을 상당수 이들 '그랜저 급' 고위직에 기용했다.
마치 각종 요직을 전리품 배분하듯 하는 이런 상황에서 적재적소의 인사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했다. 양 김씨가 집권하는 동안 내내 인사에 따른 잡음이나 독직사건이 그치지 않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능력이나 도덕성 등에 대한 검증 보다는 보스나 계보에 대한 충성심이 기용의 잣대가 된 조직에서 무슨 경쟁력을 바랄 수 있겠는가.
또 이들이 운영하는 조직에서 무슨 창의력을 기대하며, 경영합리화가 이뤄지길 희망하겠는가. 인사 뒤에는 항상 가신(家臣)이라는 사람들의 무용담이 끊이질 않았고, 비선(秘線)이라는 사조직의 활약상이 빠지지 않았다. 입만 열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했던 두 사람은 인사와 관련, 집권기간 내내 '동창회 정권(YS)'이니 '호남 향우회(DJ)'니 하는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새 정부는 전 정권들의 이런 실정(失政)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무원칙한 인사가 초래했던 폐해는 반면교사로 충분할 것이다. 다행히 노 당선자는 양 김씨와 달리 챙겨야 할 가신이나 측근이 별로 없다. 적어도 이런 악습을 답습해야 하는 것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입장이다. 적재적소의 인사를 기대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아닐까 싶다.
권력의 속성은 절대화를 추구하고 이윤은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인사실패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노 당선자 진영이 어느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는 궁극적으로 새 정부의 성패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새 정부가 여러 채널로 인재를 선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역사적 경험은 그것이 교훈화할 때 비로소 소중한 미래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최근 어느 조직에서 당선자와 같은 고교출신이 총무과장이 됐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인사가 오비이락 격이 됐다면야 할 말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염량세태(炎凉世態)라고 해도 고위층 출신교 인사들이 동이 나던 그런 구태는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정권이 바뀌면 대대적인 인사 수요가 생기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실로 막강하다. 우선 차관급 이상만 해도 어림잡아 200자리가 넘는다. 또 이들 200여 개 요직에 포진한 인사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위 '그랜저 급'만 대충 2,000∼3,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는 어떻게 적재적소의 인사를 엮어내느냐다. 노 당선자는 대선에서 자신을 '국민후보'라고 했다. 자신을 공천한 소속 당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사실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편중 및 정실인사, 이로 인한 국정의 난맥상을 되풀이 않기 위해서다. '인사가 만사'는 노무현 정부 역시 새겨 들어야 할 경구가 아닐까 싶다.
노 진 환 주필 jhr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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