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하면 흔히 실학자로만 알고 있다.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다산학'도 주로 실학 저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이른바 '1표2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경세론이 다산 사상의 열매라면, 가지와 뿌리를 이루는 것은 유교 경전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사상을 재해석하는 경학(經學)이다. 다산이 남긴 수많은 경학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매씨서평(梅氏書平)'이다.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10년에 저술한 '매씨서평'은 유가의 대표적 경전인 '상서(尙書)', 즉 '서경(書經)' 58편 가운데 동진(東晉) 사람 매색이 발견했다는 25편이 위작임을 밝혀 낸 논문이다. 방대한 분량과 까다로운 내용 탓에 전문가들도 통독하기 쉽지 않은 '매씨서평'이 다산학의 권위자인 이지형(72) 성균관대 명예교수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매색본 '상서'가 위작이라는 주장은 그 이전에도 많았지만 문장과 단어,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철저한 고증,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학문 환경 등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아우른 다산의 논리 전개는 단연 압권이다.
이 교수는 "'매씨서평'은 문헌 고증학의 전범일 뿐만 아니라 실학이 지향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 방법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자구 하나하나를 따지는 방식이 다소 고루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산이 같은 시기에 저술한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서설에서 밝힌 연유를 들어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생각하건대 독서하는 방법은 먼저 고훈, 즉 글자의 뜻을 밝혀야 한다. (중략) 후세에 경전을 논하는 선비들이 글자의 뜻이 완전히 통하지 않았는데도 논쟁을 먼저 제기하고, 미묘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아 성현의 본뜻이 더욱 희미해져 아주 작은 차이도 연(燕)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처럼 심하게 구분되니, 이는 경학 공부하는 이들의 큰 방해물이다." 요즘 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산은 문헌 고증에 그치지 않고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는데 무왕의 은나라 토벌을 '후대론(侯戴論)'을 들어 정당화한 대목이 눈에 띈다. 후대론은 제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모여 장자를 뽑고 장자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아 후(侯)를 세우고 이중 가장 뛰어난 자를 추대한 것이 천자(天子)라는 것으로, 민본주의적 자치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집필과 편집에 무려 5년이 걸린 '역주 매씨서평'(문학과지성사 발행)에서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 등 여러 판본을 대조, 정확한 원문을 밝혀 해제하고 어휘 풀이 등 꼼꼼한 주석을 단 역자의 노력도 돋보인다. '매씨서평'에서 손을 떼자마자 다산의 또 다른 경학 저서인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번역작업에 들어 간 이 교수는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경학을 포함한 다산 사상의 총체적 연구가 보다 활성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