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전 로맨스의 주인공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창건 설화를 품은 미륵사엔 동탑과 서탑 등 석탑 2개와 목탑 1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은 것은 서탑뿐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석탑이지만 탑을 둘러싸고는 의문만 가득하다. 6층까지만 남아있는 탑(사진①)을 두고 원래 9층, 혹은 7층이라는 주장이 난무했다. 1910년대 모습(사진②)에서도 6층 일부만 남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쪽이 돌무더기처럼 붕괴(사진③)된 원인과 시기도 밝혀지지 않았다. 벼락, 지진, 자연붕괴 등 다양한 추측만 있다. 일제는 1915년 여기에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사진④) 문화재 관계자들은 이번 해체과정에서 이 같은 의문이 풀리길 희망하고 있다.
"따닥 따닥."
1,000여 평 허허벌판을 둘러싼 담장과 그 가운데 가건물 공장처럼 우뚝 선 덧집.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은 정과 망치가 부딪혀 내는 일정한 파열음뿐이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가양리 미륵사지터. 10여세기 전 거창했을 절은 황량한 터로 남았고 정소리가 목탁소리를 대신해 허공을 갈랐다. 눈 내린지 며칠이 지났지만 찾는 이 없어 그대로 새하얀 절터에서 9일 기자를 맞이한 것도 그 소리였다. 문화재사에서 전례 없는 대역사(役事)이자 실험이라는 국보11호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 현장이었다.
도면만 2만장 필요 더 이상 방치하면 무너질지 모른다는 진단결과에 따라 거미줄처럼 촘촘한 나무틀로 14.24m 높이 탑을 완전히 에워싸고 해체에 들어간 것이 2001년 10월31일.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해체공정의 20%만 진행됐을 뿐"이란다. 6층 일부까지 남아있던 석탑의 절반 정도가 내려져 2층 윗부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올 한해는 2층만 해체할 계획이라 2년 여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기자의 눈이 커졌고 현장 책임자 김덕문(44) 박사는 "3년도 너무 짧다"고 앞질렀다.
3차원 탑을 2차원 도면 위에 올려놓는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또 석재 하나라도 상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보니 그렇단다. 백제인의 손에 세워져 1,400년의 풍화가 켜켜이 쌓인 탑은 해체되면 영원히 사라진다. 그 석재를 그 위치대로 쌓는다 해도 그 탑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해체작업은 탑의 모든 것을 1㎜ 오차도 없이 도면에 남겨놓는 실측작업과 함께 한다.
탑은 네 부분(탑신받침석, 탑신석, 옥개받침석, 옥개석)이 시루떡처럼 쌓여 한 층을 이룬다. 위로부터 한 켜씩 벗겨져 속살이 드러날 때마다 어김없이 세 종류의 실측을 받는다. 탑을 이뤘던 안팎 석재들의 위치와 크기는 측량기에 의해 XYZ좌표가 되고, 섬세한 굴곡과 모양은 실사용 사진기에 의해 수백 컷 사진으로 남는다. 또 3차원 스캐너가 형태대로 디지털화한다. 이어 석재 하나 하나, 전체 형태에 대해 동서남북, 상하좌우로 웬만한 설계도면 못지않은 실측 도면이 그려진다.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려고 하지만 99%일뿐이라는 두려움이 앞선다"고 김 박사는 실토했다. 그래서 석재가 내려지면 석고를 뜨거나 직접 습자지를 대고 돌 위 굴곡으로 남은 백제 석공들의 손길을 따는 작업이 더해진다. 30㎝높이 한 켜가 벗겨질 때마다 작업은 반복된다. 전문가 한명이 도면 한 장을 그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3주라고 했다. 지난 1년간 그렇게 800장의 도면이 그려졌다. 김 박사는 "해체 작업이 끝나면 2만장의 도면이 그려질 것"이라고 했다.
석탑 돌의 원산지를 찾아라 탑을 이루는 화강암 석재 하나의 무게는 수백㎏에서 2톤을 넘기도 한다. 자동 크레인을 사용한다지만 내려놓는 일이 만만치 않다. 인간문화재급 '드잡이공' 홍정수(63) 선생이 직접 돌의 무게중심을 잡아 묶어 내린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 "신중히, 천천히"라는 말이 홍 선생의 입에 붙었다.
다음은 보존 처리 담당자들의 몫이다. 이물질을 에어브러시로 닦아내고 석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적외선 촬영과 풍화 정도, 강도측정이 이뤄진다.
보존처리를 담당하는 양희제(36) 조사원은 "탑을 이룬 돌은 그 하나가 바로 탑"이라고 했다. 그래서 돌 하나 하나의 생명력을 연장해야 하고, 그래서 시급한 것이 원산지를 찾는 일이라고 했다. 화강암은 난 곳에 따라 사람의 DNA마냥 제 각각 자성(磁性)을 띤다. 조사원들은 그 자성을 근거로 인근 채석장과 미륵산을 오르내리며 백제 석공들이 돌을 캐냈을 터를 찾는다.
탑의 공력이 불러 모은 사람들 문화재연구소 주도의 석탑 해체보수 현장을 지키는 이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18명. 이들 가운데는 4명의 익산지역 석공이 포함돼 있다. 석공들은 흉물스럽게 발린 석탑 주위 콘크리트를 떼내는 일만 한다.
웅장했을 탑은 미륵사의 쇠락과 세월의 무게로 동북쪽 3분의1만 남기고 나머지는 서낭당 돌무더기처럼 허물어졌다. 1915년 일제는 보존을 명목으로 그 곳에 콘크리트를 입혔다. "보강만해도 될 일을 흉물처럼 덧씌운 데는 '식민지 문화재'에 대한 그들의 악의적 의도가 깔렸던 것 같다"고 조사원들은 입을 모았다.
40년 경력 석공들은 수려한 석물을 빚어내던 정으로 종일 수도하듯 콘크리트만 쪼아낸다."기계를 들이대면 금방이제. 하지만 탑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가면 안돼. 또 콘크리트 속에 원석재도 섞여 있어 조심해야 해."석공 진상천(59)씨의 얘기다.
조사원과 보존처리를 담당하는 직원 가운데 7명은 한 켠에 지어진 임시숙소에서 먹고 잔다. 주말마다 집으로 가는 게 귀찮아 아예 가족을 이끌고 익산으로 이사 온 이들도 여럿이다. 대개가 고건축학을 전공한 석박사급 고학력의 전문가들이지만 평균 연봉이 1,500만 원대다. 한명을 제외하곤 임시고용 계약직이다. 자기 돈을 들여 밥을 해먹거나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야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석탑을 위해 모인 비밀결사대"라고도 했다. 서울 출신 양 조사원은 "아름아름으로 모였는데도 팔도 사람들이 다 모였어요. 우리끼리는 탑의 공력(功力)이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그렇다고들 해요"라고 했다.
복원시기는 기술·의식 수준이 결정 "해체하고 나면 1,400년 전으로 복원하나요?" 기자의 질문에 조용하던 김 박사가 흥분했다. "복원이란 게 있을 수 있나요. 백제 장인들이 평생을 바쳐, 아니 누대에 걸쳐 쌓아올렸을 탑입니다. 현대의 기계로 돌려놓을 수 있나요."
최소한만 손을 대고 1,400년간 비바람과 풍화를 견디고 그 앞에서 기도했던 무수한 이들의 염원을 품었을 탑 그 자체로 남겨둬야 한다는 게 이 곳 사람들의 복원에 대한 생각이란다.
석탑 해체 이후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선 현재로선 그 어떤 방안도 잡혀 있지 않다고 한다. "해체가 끝난 뒤 그때의 우리 기술과 의식 수준이 결정할 일"이라고 김 박사는 알 듯 모를 듯 답했다. 석탑을 해체하는 이들은 그래서 "현재로선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정밀하게 남겨두고자 한다"고 했다. 현대의 기계가 번듯번듯,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복원 아닌 복원에 익숙한 '문화재 관리 후진국'에서,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작업은 그래서 꽤나 실험적이고 선진적으로 평가받는다.
양 조사원은 "백제 장인들의 공력은 못 따라가겠지만 콘크리트가 더해지기 전 석탑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공력이라도 쌓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매일 돌탑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익산=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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