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재벌 편중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거치면서 상위 20%가 전체 부(富)의 80%를 차지하는 '20대 80의 법칙'이 고착화했듯이, 주식시장에서도 일부 재벌 기업이 시가총액의 대부분을 독점하며 증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벌기업의 독주 현상은 다른 대다수 종목의 소외감을 부채질해 증시의 균형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경영 투명성과 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계열사 주가가 줄줄이 하락하며 증시 전체가 요동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양극화의 폐단이라는 것이다.■4대그룹 시가총액 50.0%
우리 주식시장을 들여다보면 DJ정부의 재벌정책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IMF 위기를 계기로 재벌 해체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강력히 추진했지만, 오히려 강력한 극소수의 재벌체제로 재편됐을 따름이다. 특히 삼성 등 일부그룹에 대한 증시 의존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12일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삼성 LG SK 현대(자동차·중공업 포함) 등 4대 그룹의 시가총액은 1990년 전체의 20%에 불과했으나, 97년 30%를 거쳐 올들어 50%를 넘어섰다.
특히 삼성그룹 상장사들의 시가총액은 전체의 27.3%인 70조4,700억원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90년 시가총액 비중은 전체의 4.5%에 불과했고, 96년(10.4%) 이전까지도 한자리수에서 맴돌았다. SK그룹 시가총액은 98년 7조3,867억원에서 불과 4년 만에 3.6배인 23조5,743억원으로 불어났다. 비중은 5.3%에서 9.1%로 상승했다. LG그룹 시가총액도 98년 6조3,523억원에서 10일 현재 19조2,195억원으로 3배 가량 늘어났다.
■증시 냉각의 주요인은 삼성전자?
삼성그룹의 부각은 전체 시가총액의 19.2%(49조4,859억원)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때문이다. 삼성전자 한 종목이 그룹 시가총액의 70%나 된다. 삼성전자는 4년 전에도 개별 종목 가운데 시가총액 1위였으나, 그 비중은 전체의 7.9%에 머물렀다. 더욱이 90년 시가총액 비중 2.3%에 비하면 12년 사이 무려 10배 가량 성장한 셈이다.
시가총액 2위인 SK그룹도 SK텔레콤 한 종목이 거래소 전체의 7.6%(19조6,136억원)를 차지한다. 그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4%. 나머지 이동통신업체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한 것보다 3배 이상 많다. LG와 현대그룹의 간판인 LG전자, 현대차 등의 시가총액 비중도 전체의 2.3%를 넘는다.
특정 종목의 시가총액 비중이 이렇게 크다 보니 증시는 거의 매일 삼성전자 SK텔레콤 등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 종목의 독주가 시장 전체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정의석 부장은 "삼성전자 등 핵심주들의 선별적인 상승이 전체 지수의 반등을 가져오긴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종목들은 오히려 주가가 떨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까지 증시에서 거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개인투자자들이 삼성전자와 같이 비싼 주식을 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증시의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외국인의 매매패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해 외국인의 순매도·순매수 상위종목은 삼성전자, 현대차, 삼성전기, 삼성SDI, LGEI, LG카드, 삼성증권 등 재벌 계열사 일색이다. 이미 외국인의 한국 주식 보유비중이 35%를 훌쩍 뛰어넘은 상황이라 주식 전반에 대한 고른 투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기업의 가치와 실적을 보라
한국 증시는 1989년 3월 31일 1,000선을 처음 뚫은 이후 13차례나 1,000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15년 이상 500∼1,000선을 오르내리는 '게걸음 장세'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수 1,000시대'에 안착하기 위한 해답은 바로 삼성전자에 있다.
삼성전자의 독주는 그만큼 기술력, 마케팅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 종목의 독주가 지속될 경우, 전체 장세의 고른 상승세를 막아 지수 업그레이드를 요원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의석 부장은 "삼성전자의 상승이 개인의 투자심리를 냉각시켜 시장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우리 증시의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삼성전자와 같은 우량기업이 두세 개 더 나와야 지수가 1,000포인트를 뚫고 추세 반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주식시장도 삼성전자 등 일부 업종 대표주들이 상승세를 구가하고, 중간중간 소외주들이 반발성 틈새 테마를 형성하는 양극화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일투자증권 김정래 리서치팀장은 "국내 증시에는 순자산만큼도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저평가주들이 수두룩하다"며 "재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단타매매에 나서기 보다는, 기업의 가치와 실적을 보고 장기 투자하는 분위기가 정착돼야 양극화 현상이 누그러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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