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재벌을 표적 삼아 정책을 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재벌개혁은 장기적·단계적·자율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차기 정부가 서슬 퍼런 재벌정책을 펼 것이라는 억측이 구구한 가운데 8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가 자신의 재벌정책 구상은 '시장친화적'인 방식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노 당선자는 "재벌개혁의 기본 방향은 시장경제 체제를 자유롭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데 목표가 있으며, 이를 통해 대내외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과제"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진표(金振杓)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은 "기본적으로 재벌개혁을 포함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조치는 99%가 입법사항"이라며 "개혁 입법은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은 또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해체문제와 관련, "기업경영에 관한 사항으로 기업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게 노 당선자의 뜻"이라며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사안이며 논란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노 당선자가 이처럼 시장친화적인 개혁을 표방하면서 일각에서는 고강도로 예상됐던 재벌개혁이 한발 '후퇴'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부위원장은 "재벌개혁의 노선 수정은 아니며, 과거 현정부 초기 '빅딜'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차기 정부에 잔뜩 얼어있는 재계에 '너무 겁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준 셈이다.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재벌개혁 기조는 그대로 승계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지만 특정대상을 겨냥하거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괴롭히지는 않겠다는 취지라는 해석이다.
다만 기업이 스스로 자율적이고 점진적으로 지배구조와 계열분리 등의 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게 노 당선자의 주문이다.
노 당선자가 직접 나서 재벌정책 구상을 밝힌 데는 재계와 해외 투자자들의 우려를 의식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최근 손병두(孫炳斗)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이 '총대'를 메고 비판에 나서자 정권 출범 전부터 재계와 불필요한 갈등은 빚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이라크 전쟁 가능성 등으로 세계경제 회복이 지연될 것으로 우려되면서 강도높은 재벌개혁이 가뜩이나 위축된 기업들의 투자심리와 의욕을 꺾어놓을 것이라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수위 관계자는 "노 당선자의 재벌개혁 정책은 절차와 방법면에서 가급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되 구시대적인 족벌·세습경영은 타파한다는 기본 정신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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