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이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금까지 완강하게 유지해 왔던 대북 대화의 전제조건을 누그러뜨려 북한과 대화의 자리에 마주할 수 있는 길을 튼 것은 북한 핵 사태의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할 만하다.북한의 핵 개발 계획 폐기를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대화를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온 미국 정부가 이제는 '검증 방법'을 북한과의 대화 의제로 올리겠다고 나선 것만으로도 정책의 상당한 변화이고, 강경 노선의 후퇴로 해석될 만한 여지가 많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회의 후 "북한이 먼저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도 북한과 직접 대화에 들어갈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즉답, 미국의 대북 대화에 대한 전제조건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미국의 이런 변화는 다목적의 포석이 깔려 있다. 뉴욕 타임스는 "미 정부의 입장 선회는 북한과의 대결 분위기뿐 아니라 한미 간 협상 전략의 잡음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북한에게는 핵 폐기를 선언할 수 있도록 명분을 주고,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에 대해서도 체면을 살려주는 효과를 노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새롭게 출범하는 노무현(盧武鉉) 정부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탄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실제로 공동발표문 초안에 "북한의 협박과 공갈에 대응해 대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표현을 넣으려 했으나 우리측의 요구로 "북한이 국제의무 준수를 위해 보상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순화된 표현으로 바꾸는 융통성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동시에 최소한의 대북 대화 용의 표명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온건파 등 미국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커지고 있는 대화 압력에서 비켜나고, 북한에 대한 '무보상, 무혜택' 원칙의 강조로 대북 강경론자들의 반발도 무마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번 발표를 미국의 대 북한 핵 정책의 실질적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대화 표명에는 여전히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있다. 북한이 우라늄 핵 개발 계획의 폐기와 영변 핵 시설 동결 해제조치의 원상 회복을 선언하는 조치가 있어야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게 미국측 발표의 요지다. 게다가 대화의 내용도 북한과 미국이 핵 폐기를 전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북한 선언의 진실성과 구체성을 따지는 식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발표가 핵 폐기를 조건으로 체제보장과 중유 공급 등 경제적 보상을 바라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느냐는 데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때문에 외교 전문가들은 북미가 실질적인 대화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