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말 TV에서 방영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사생활이 정보기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 당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영화다.'국가의 적'정도로 바꿀 수 있는 제목을 굳이 영어로 고집한 방송사의 무신경이 거슬리긴 했지만,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 때문에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영화는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함부로 파헤쳐지고 조작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상을 얄미울만큼 생생히 보여주면서 할리우드 오락영화가 빠지기 쉬운 경박함을 잘 피해가고 있다.■ 도청을 승인하는 법안에 강력히 반대하던 국회의원이 국가안보국에 의해 피살되고, 살해장면이 담긴 녹화테이프가 우연히 노동전문 변호사의 짐 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테이프를 손에 넣으려는 국가안보국과 영문을 모르는 변호사와의 추격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감시 카메라와 전화 도청은 물론, 옷 구두 시계 만년필등에 위치추적 장치가 숨겨진다. 인공 위성이 주인공의 이동경로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은행 계좌 조작도 컴퓨터를 통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영화는 정보기관이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첨단 기술을 악용하면 개인을 파멸시키기가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 영화가 실감 있게 느껴진 것은 정부에 의한 정보 축적과 국민의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가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이나 위성을 통한 위치추적장치는 더 이상 미래의 기술이 아니다. 개인 신상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 구축으로 국가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은행계좌나 거래내역, 통화기록은 물론, 교우관계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다. 정보 네트워크가 부도덕한 권력에 의해 장악돼 모르는 사이 구성원들이 감시·통제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 국회의장뿐 아니라 청와대와 금융감독기관 고위인사의 통화가 도청되고, 백주에 통화 녹취록이 나도는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허구이고 지나친 비약'이라고 간단히 웃어넘길 수 있을까. 최근 경기도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서 도·감청 탐지장비 구입 붐이 일고 있는 것도 불법 도청이 만연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의 인권을 침탈할 수 있는 권력의 위험성을 방치하고 감시자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없는 국가에서 공공의 적은 바로 국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창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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