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대통령의 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대통령의 귀

입력
2003.01.08 00:00
0 0

새 대통령은 선거공약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선정한 과제를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갈 것이다. 국정을 운영함에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각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자질이 가장 큰 관건이다. 새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이야기는 비밀은 감추어 질 수 없다는 교훈으로만 새겨서는 안 된다. 비밀이 밝혀진 것을 안 임금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린 귀를 떳떳이 보이며 백성의 소리를 모두 들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소망은 국민의 작은 소리조차 귀담아 들어달라는 것이다.우리 역사에 성군으로 칭송되는 임금의 공통점은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1430년 새로운 조세제도에 대해 신료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세종은 직접 백성의 의사를 묻기 위해 8도에 걸쳐 촌민(村民)을 중심으로 약 17만3,000명의 의견을 조사해 반대하는 백성의 뜻에 따랐다. 영조도 1750년 균역법(均役法)을 도입하면서 백성의 의견을 조사하여 부담을 경감하였다.

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백성과 만나 고충을 들으려 하였다. 정조는 서울이 아닌 오늘날 수원인 화성(華城)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세워 궁궐을 벗어나 수시로 화성에 행차하였다. 임금이 거동하는 곳에는 백성이 모여들어 괴로움과 억울함을 직접 하소연하였다. 글 아는 백성은 문서로, 글 모르는 농투성이나 무지렁이들은 어가(御駕) 앞에서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알렸는데, 이를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라고 한다. 정조 재위기간(1776∼1800) 동안 모두 4,400여건의 상언과 격쟁이 있었다. 백성이 호소한 내용은 조상의 신원(伸寃)과 포상 등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과도한 세금, 관리의 수탈, 토지를 침탈 당했다는 것, 소송에서 억울하게 졌다는 것 등 아주 다양하였다. 정조는 직접 사건의 처리를 지시하여 상당부분 백성의 원억(寃抑)을 해소하였다.

숙종은 정사보다 야사에 더 많이 등장하는 성군이다. 대개 숙종은 야밤에 아무도 모르게 궁궐을 빠져 나와 평민으로 변장하여 실제 백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고통을 들었다. 암행어사 이야기도 숙종대가 제일 많다. 실제 암행어사가 한 역할은 이야기에 전해오는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백성에게는 정의를 실현하는, 또 그들의 애달픔을 직접 임금에게 전달해주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훌륭한 암행어사의 활약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역사를 돌아볼 때, 백성과 동떨어져 있는 임금은 훌륭한 임금이 되지 못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나라마저 잃었다. 중국 특히 명나라에서는 황제가 궁궐을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실제 9세에 즉위한 신종(神宗·재위 1572∼1619)은 마지막 30년 동안 한 번도 자금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렇게 백성과 절연된 황제는 환관의 손아귀에서 놀아났고 결국 나라까지 잃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조 사후 순조대까지는 상언과 격쟁이 어느 정도 이어졌지만, 세도정치가 극심한 헌종대 이후는 사라졌고 마침내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의 대통령이 왕조시대의 임금과 같지는 않고 그 때의 임금처럼 되리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청와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통령은 구중궁궐에서 환관과 관료에 둘러 쌓인 임금과 다를 바 없다. 한치라도 더 국민에게 다가서려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달라진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였다. 새 대통령은 집무실을 옮겨 비서진과 함께 국정을 수행한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반가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집무실만 옮긴다고 국민과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열려 있는 귀와 가슴이 더 중요하다. 5년 후 국민의 하소연을 싫증내지 않고 마냥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대통령이기를 기대한다.

정 긍 식 서울대 법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