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간 이동장벽이 낮아지면서 법망을 피해 해외로 달아나는 범죄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비리를 저지른 유력인사들의 해외도피는 유행이 되다시피했다. '일단 해외로 피해 훗날을 기약하라'는 잘못된 인식이 사회 전체에 팽배하다. 심지어 대우그룹 경영비리와 관련해 3년째 해외 도피중인 김우중(金宇中)전 회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국이 나를 배신했다"고 큰소리쳤을 정도다. 또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된 최성규(崔成奎) 전 총경은 해외도피 중 가족을 통해 버젓이 퇴직금을 받아갔다. 해외도피자들이 반성은 커녕 언론을 빌어 호통치고, 사정기관이 해외도피자를 감싸는 듯한 의혹이 제기되는 등 기현상이 속출하면서 사회의 도덕률과 가치관마저 흔들리고 있다.■수그러들지 않는 해외도피
지난해 초 음주운전을 하다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뒤 달아난 김모씨. 과실치사에 뺑소니혐의까지 더해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김씨는 경찰의 검거망이 좁혀오기 전 과테말라로 일찌감치 도망쳤다. 경찰은 7월 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요청했지만 검거 소식은 아직까지 들리지 않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7월말 현재 총 해외도피 사범은 640명. 98년 이후 해외로 도피한 사범이 501명에 달한 반면 같은 기간 검거된 해외도피사범은 144명에 불과했다. 전체 해외도피사범 640명중 사기 415명(64.8%), 횡령·배임 68명(10.6%) 등 경제사범의 비중이 무려 75.5%에 달하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장기 해외도피사범 중에는 대형 경제사건 및 게이트에 연루된 '거물'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최성규 전총경 외에도 이른바 '세풍' 사건의 이석희(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 대통령 차남 김홍업(金弘業)씨의 감세청탁을 들어준 혐의를 받고 있는 안정남(安正男) 전 국세청장, 연예계 비리 사건과 관련해 SM엔터테인먼트 대주주 이수만씨, 영화제작자이자 개그맨인 서세원씨 등도 이름을 올렸다.
또 여대생 하모양 피살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폭력배 2명도 지난해 5월 출국했다.
■유명인사 해외도피 '유행'
해외도피가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법률적으로는 "아니다"가 정답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형사소송법 253조 3항은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귀국하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민정권 시절 12·12및 5·18사건 수사가 본격화되기 직전 해외로 도피했던 박희도(朴熙道), 장기오(張基梧)씨는 99년 슬그머니 귀국했다. 이 때는 이미 주요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모두 끝나고 사면복권까지 이뤄진 뒤였다.
김이 빠진 검찰은 12·12의 주역들을 구속해 엄단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을 불구속기소했고, 이들은 1심 재판 후 사면을 고려해 항소를 포기한 뒤 2000년 8월 형선고실효 사면을 받아 자신의 전력을 깨끗이 세탁했다.
탈세혐의로 도피했다가 96년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의 선고공판일에 귀국했던 전낙원(田樂園) 파라다이스 회장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일단 외국으로 도망간 뒤 여론의 관심이 식으면 슬그머니 귀국해 관대한 처분을 받고 사면복권을 받는 '묘책'이 생겨난 것이다. "해외도피 제일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은 검찰과 법원, 정치권의 공동책임"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도피범 안 잡나, 못 잡나.
검찰은 지난해 7월 10억원 이상 사기 등 재산사범 5,000만원 이상 뇌물사범 5억원 이상 조세포탈사범 20억원 이상 부도사범 법정형 5년 이상 중대사범 등 총 176명을 '주요국외도피사범'으로 분류, 전담검사를 지정하는 등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권 재발급이나 연장을 막는 일 이외에 실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어 검거실적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해외도피사범 검거는 외국 수사기관의 협조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해당 국가의 협조가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검거에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 범죄인인도조약
외국으로 도피한 국내 범죄인의 검거 및 국내소환은 국가간 범죄인 인도조약에 근거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16개국이며 자국 국회의 비준을 거치지 못해 조약이 발효되지 않은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15개국.
그러나 조약 체결이 실제 해외 도피범의 검거와 소환에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한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한 국가에 체류하고 있는 도피범은 전체의 약 85%에 이르지만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50여 명에 대해 범죄인인도를 청구, 10여 명의 신병을 넘겨받았을 뿐이다.
가장 큰 원인은 일단 범죄인인도가 두 나라에서 모두 처벌 가능한 도피자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도피범이 해외에서 검거됐다고 해도 '국내 인도'가 타당한가에 대한 해당국 법원의 별도 판결을 받아야 한다. 피의자가 '인도심판' 대상이 아니라며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경우나, 구금이 적법한지를 따지는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할 경우 재판 및 인도절차가 끝없이 늦춰질 수 있다. 또 법원의 인도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국무장관이 뒤집을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범죄인 인도가 사상범 등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악용될 수 있는 점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풍토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 중국 등이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된 나라이면서도 이들 범법자들이 주로 도피하는 곳이라는 점이 조약의 헛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비조약 국가의 경우 '이후에 한국에 도피한 범죄인 검거에 협조하겠다'는 식의 상호주의적 제안을 우리측이 들이댈 경우 범죄인 인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피자들이 비조약 국가를 기피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경제범들을 중심으로 비조약국가 대신 연고자가 많은 미국이나, 가깝고 외모가 튀지 않은 중국·일본 등을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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