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오정국
물 위에 쓴 문장들, 그렇게 흘러가 버리고
모래밭에 새긴 이름들, 이렇게 날려가는데
백수광부가 이쪽으로 물을 건너오는 게 보였다
내 몸을 뜨겁게 껴안아주었다 아 아
그에겐 애당초
신발조차 없었던 것을,
터널을 빠져나오는 전동차의 불빛에
지하철 표지판처럼
창백하게 몸을 떠는 얼굴들
힘겹게 선물꾸러미를 안고 있는 사내들
누가 저 빈 집을 지키고 있나
올해 들어 가장 푸짐한 눈이 내리고 있다
■시인의 말
백수광부(白首狂夫)는 별로 가진 게 없는 사내였을 것이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쉽게 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죽음까지도 자유롭게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말연시, 선물꾸러미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비어 있어야만 자유롭고 또 아름다운 게 아닐까? 비어 있어야만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초극할 수 있지 않을까?
■약력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현대문학" 추천 등단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등 서라벌문학상 수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