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 정치 구현과 지역화합을 위해 2월 임시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 총무는 3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쑥 내각제 개헌론을 꺼냈다. 이 발언이 얼마나 느닷없는 것이었는가는 다른 당직자들의 당황한 표정에서 당장 읽혀졌다. 박종희(朴鍾熙) 대변인 등 일부 당직자는 속개된 비공개 회의에서 이 총무의 발언 배경을 따져 묻고 언론에 해명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총무는 되레 "내년 17대 총선 때 내각제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면 된다"고 구체적 일정까지 제시했다.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도 하기 전에 대통령제를 원천 부정하는 내각제 개헌을 논의하자는 주장은 그야말로 황당하다. 더구나 대선 승자도 아닌 패자 쪽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케 한다. 또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서는 원내 의석의 3분의 2가 필요한 헌법 조항에 비춰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현실성이 전혀 없다.
이 총무의 개헌론이 한나라당의 당론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당내에는 분명히 있다.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 일부 중진이 겪고 있는 '심리적 공황'과 이 발언이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집권당 시절을 경험한 중진들은 "어떻게 또 5년을 기다리느냐"며 대선 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내각제를 들먹이고 있다. 혹시 내각제가 되면 권력을 일부나마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에서다. 원내 사령탑인 총무가 공식석상에서 내각제를 입에 담은 배경에는 이런 저변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막막한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되지도 않을 일을 한번 찔러보는 식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것은 곤란하다. 한나라당의 재기는 쓸데없는 미련을 털어버리고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대우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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