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엘 고어 후보의 패배는 국내 정보기술(IT) 산업에도 커다란 재앙이었다. 가뜩이나 과잉설비로 IT업계가 침체에 빠져 있던 상황에서 고어의 차세대 산업 아젠다인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 구상'이 순식간에 신기루로전락하자, 당장 미국 내 광통신업계가 일대 구조조정의 혹한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태평양을 건너 세계 광통신산업의 강자를 꿈꾸며 신기술 개발에 여념이 없던 국내의 관련 벤처업계에도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대전 대덕연구단지 안에 자리잡은 광통신망 관련 업체 '노베라옵틱스코리아' 역시 그 타격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고통을 체험한 벤처기업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이창희 기술고문(공학박사·KAIST 교수)은 "이제 침체의 시기가 끝났다"며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 광통신 IT산업의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베라옵틱스는 처음부터 미국에 법인을 설립할 만큼 세계를 무대로 승부를 시도했다. 199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개발된 광신호 증폭기술을 당시 장거리 광통신산업의 메카였던 미국에서부터 상용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덕단지에 있는 사무실은 연구개발(R& D)을 위한 한국지사 법인이다.
'정보고속도로' 구축에 필수적인 광케이블은 통상 장거리인 경우 600㎞, 초장거리인 경우 1,000∼4,000㎞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광신호는 통상 100㎞가 지나면 원래 발신량의 1%만 남게 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40㎞마다 증폭기를 설치해야 했다. 노베라옵틱스는 초음파를 이용한 '능동형 광필터'를 이용해 광신호를 최초 발신지로부터 640㎞ 거리에서도 원래대로 복원, 증폭할 수 있는 증폭기를 개발했다.
엄청난 고가장비인 광증폭기 설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2001년2월까지 미국 실리콘벨리 등지의 벤처캐피탈 등으로부터 무려 6,700만달러(약 800억원)의 투자가 쇄도했다. 연간 예상 매출 5억달러 규모. 전세계 광통신망 가설 부문에서 한국발 '노베라옵틱스'의 성공이 눈 앞에 온 듯 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직원수 70여명 규모의 노베라옵틱스 본사 겸 생산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에는 추가 기술개발을 위해 연구원 30여명 규모의 지사를 세워 본격적인 양산체제에 들어갔다. 국내 법인이 연구개발(R& D)를 담당하는 '머리' 역할을, 미국 본사가 생산을 담당하는 '손발'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품생산을 앞두고 최대 수요처인 노텔, 루슨트테크놀로지 등 굴지의 광통신업체가 휘청거리더니 순식간에 그 많던 수요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능동형 광필터링' 기술은 특허이기 때문에 여전히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노베라옵틱스는 그 때 이후 1년여간 시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동안 미국 생산공장의 문을 아예 닫고, 국내 연구진도 20여명으로 줄여 새 시장을 찾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광증폭기 판매 차질은 KAIST와 인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에서 '인생을 걸고' 이 회사로 전직한 내로라하는 국내 전문가들의 자존심에도 적지않은 상처를 줬다.
서울대 공학박사 출신의 한 연구원은 "내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가 했더니 하룻밤 새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느낌이었다"며 "올해 초만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고 말했다.
'노베라옵틱스'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김병윤 박사(KAIST 교수·휴직중)는 "초기 펀딩한 자금이 풍부했기 때문에 당장 자금줄이 마를 상황은 아니었다"면서도 "최소한 연구원들에게 만이라도 재기의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새로운 수익모델 만들기를 재촉했다"고 말했다.
광증폭기 생산을 유보한 지 10여개월. 마침내 재기를 위한 발판으로 개발에 성공한 제품이 바로 '초고속 광가입자망 서버(WDM-pon)'이다.
이 제품은 여전히 전화회선을 이용하는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회선(ADSL)'과 '초고속 디지털 가입자회선(VDSL)'의 기술력을 단번에 뛰어넘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전화국에서 가정에 이르는 통신망을 광케이블로 완전 대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 각 통신회사가 기존 ADSL을 대체해 앞다퉈 설치하고 있는 VDSL의 전송속도가 평균 10Mbps 내외인데 비해, WDM-pon은 10배에 가까운 100Mbps의 속도를 안정적으로 서비스할 수 있는 시스템. 이 고문은 "일본이 지난해부터 설치하기 시작한 광통신가입자망(FTTH)이 전화선 대신 아예 광통신망을 가정까지 연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향후 중복투자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제 기존 VDSL설치 작업과 함께 WDM-pon을 이용한 광케이블 설치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KT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VDSL이 기존 2차선 도로를 8차선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면, WDM-pon을 이용한 광케이블 설치는 16차선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라며 "디지털TV 쌍방향(VOD)서비스 등을 앞두고 수출 외에 약 3조원 내외의 국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상배 광기술연구센터장은 "광통신망 관련 기술은 무선통신을 뒷받침하는 기반기술이기 때문에 조만간 26조원의 시장을 창출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성장의 신화를 이어갈 부문"이라고 전망했다. 이 센터장은 이에 따라 "'노베라옵틱스' 등 국내 광통신 업계가 확보한 세계적 기술력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판교 등 향후 건설되는 신도시 등에 광가입자망 시범단지 지정 등도 정부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대전 대덕단지=장인철기자 icjang@hk.co.kr
■세계 광통신산업계 2보 전진위한 조정기
왜 광통신인가? 세계 광통신 및 부품 산업은 2001년 미국의 월드컴(Worldcom) 등 60여개의 통신사업자가 도산하고 460여개의 닷컴 기업이 파산하는 등 전반적 소강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광통신 산업은 여전히 세계 산업성장의 동력이며, 타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고도화를 견인한다는 점에서 발전 여력이 무한한 황금광맥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상배 광기술연구센터장은 "최근 IT 침체는 장기적인 도약을 위한 구조조정 과정"이라며 "선진국의 침체기는 거꾸로 국내 기술력 및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중국 및 대만의 저가 기술을 따돌릴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말했다.
실제로 업계등에 따르면, 시스템과 장비분야를 합친 광통신 관련 산업의 시장 전망은 2005년까지 연간 546억달러(한화 약 66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광통신산업은 전송케이블망을 기본으로 광증폭기, 광소자, 각종 점검기기 등 이른바 '틈새기술' 하나만으로도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IT 벤처업체들로서는 도전의 여지가 넓게 열린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장 활성화와 기술개발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 이를 감안해 각국은 최근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향후 시장 활성화에 대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캐나다와 유럽 등에서는 정부 지원에 따라 관련 사업자 및 산업체, 연구소들이 차세대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일본은 NTT 주도로 광가입자망 보급 추진 및 핵심기술 개발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유럽의 다국적 기업인 알카텔과 지멘스의 경우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새 기술개발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내 광통신 산업은 이에 비해 국제경쟁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위축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주로 메트로시스템용 DFB LD, EML 등 광능동 소자 기술에서 세계 선두권의 기술력을 갖췄으나 대규모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
비교적 꾸준한 영업활동을 벌이는 업체로는 광모듈 패키징 기술로 일본에 납품해 연간 약 20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빛과전자'가 있으며, LG전선 자회사인 '네옵텍'은 국내 이동통신용 광중계기 분야의 광모듈 공급업체로 연간 40∼50여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노베라옵틱스'나 역시 대덕단지 내에 있는 'XL광통신' 등도 새로운 시장진입을 모색중인 업체이다.
장기 성장을 위한 과제 'XL광통신'의주흥로 대표는 "국내 업계와 출연연구소 등에 축적된 광통신 부품 관련 기술은 부분적으로 이미 세계 첨단 수준에 근접했다"며 "이들 기술의 시장 활성화를 위해 국내에서도 광가입자망의 조기 보급을 지원하는 등 정부 차원의 장기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IST 이상배 센터장은 "최근 선진권의 R& D 패러다임은 국가적으로 산·학·연 연계 기술 개발로 기술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노베라옵틱스' 김병윤 대표는 "매각 또는 피인수 업체의 담보부담을 경감하는 등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는 실질적 정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장인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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