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벽두를 멋있게 시작하려다 난리굿으로 끝냈다. 친구 커플이 우리가족을 송년 음악회에 초대해줘 멋진 클래식 선율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한 것까지는 정말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런데 귀가 길에 큰 애가 갑자기 저녁 먹은 게 얹힌 것 같다며 거의 인사불성이다.밤새도록 끙끙 앓다 떡국도 못 먹은 채 널부러진 아이를 두고, 문 연 약국 찾느라 동네방네 헤매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보낸 나는 연신 ‘이건 액땜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뭔가 좋지않은 일이 생기면 더 큰 나쁜 일에 대한 땜막이라고 스스로에게최면을 거는 것은 내 오랜 버릇이다. 집안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만사제쳐놓고 장부터 듬뿍 봐다가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하곤 했던 친정어머니로부터 배운 나름의 위기 극복법이기도 하다.
온실속 화초보다 들판의 잡초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굴곡이 생을 더 풍요롭게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난요란하게 열린 2003년의 설계를 어느 해보다 진지하게 해보기로 했다. 나쁜 건 다 지나간 셈이라고 치고.
음, 우선 뒤바뀐 것 하나 바로잡기. 그건 내 고질병인 ‘느긋한 몸과 여유없는 마음’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느긋한 몸’은 ‘부지런한 몸’으로, ‘여유없는 마음’은 ‘느긋한 마음’으로 맞바꾸기로 했다. 머리속은 한없이 복잡해 괜스레 번잡스럽기만 하면서 몸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없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심신의 어긋남과는 이제 그만 안녕하고 싶다.
큰 애가 요즘 푹 빠져있는 재즈댄스 학원엘 같이 가볼까. 아니면 요가에도전해 볼까. 한 선배는 올 계획중에 ‘스윙 댄스’ 배우기를 꼽아 날 놀라게 했다. 최소한으로 정해진 법칙에 최대한 개성을 살린 애드립과 라이브가 스윙의 매력이라며, 올 5월에 한국에 올 예정이라는 스윙의 대가 프링키 매닝 할아버지와 춤 한판 추어보는 것이 꿈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후배 하나는 자기 인생에 장기 플랜을 세워보겠다고 했다. 너무 무계획적으로 살아온 나날이 후회스러워 1년, 3년, 5년 단위로 큼직한 목표를 하나씩 만들어 보겠단다. 그의 1년 계획은 우선 일본어 검정시험 1급 따기. 3년 후엔 중국어까지 정복하겠다는 그에게 차마 ‘40대 초반의 굳어진 머리로?’라고 되묻지 못했다. 반짝이는 눈빛이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세대에겐 먼 훗날의 계획을 세운다는 게 영낯설다. 하루 앞도 내다보기 힘든 판에 무슨 인생설계? 하지만 꿈을 갖고도전하면 이루어진다는 걸 56세 동갑내기 히딩크 감독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주저앉기엔 지난해월드컵과 대선이 가르쳐준 교훈이 너무 컸다.
/이덕규(자유기고가)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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