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31일 오전 1시간 동안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대미 정책과 인사 문제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발언이 미칠 파장과 대외 관계 등을 고려한 듯 발언 수위와 용어를 선택하는 데 신중을 기했다.노 당선자는 대미 관계에서의 자존 의식을 강조하면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 정부'를 표현하는 용어로 처음에는 '체면, 체모' 등을 썼다가 맘에 들지 않은 듯 배석한 임채정(林采正) 인수위원장에게 도움을 청해 '위엄'이라는 말로 바꿨다. 그는 또 한나라당의 인사청문회 공세에 대해 "그렇게 시비 거는 방식으로…"라며 공박하려다가 야당과의 관계를 감안한 듯 웃음을 지으며 "그 얘기 안 할게요"라며 말문을 닫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그러나 전날 한나라당 의원들이 일부 인수위원들을 주사파라고 공격한 데 대해선 "난 주사파가 뭔지 모르겠다. 연말에 술을 많이 먹고 집에 못 들어 가는 분들을 말하느냐"며 냉소적으로 반박했다. 상속 ·증여세 완전포괄주의 입법에 대해서도 "위헌이 아니라고 보며 법이 위헌이라고 하면 헌법에 근거를 만들더라도 이 법은 해야 한다"고 신조를 굽히지 않았다.
노 당선자가 이날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대미 정책과 인사 문제였다. 노 당선자는 특히 대미 외교와 관련, 미국과의 수평적 상호협력 관계 및 대미 자주외교 원칙을 재차 피력했다. 미국의 '대북 맞춤형 봉쇄정책'에 대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한국 정부가 수용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미 공조가 아니며 문제를 풀어가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여기에는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돼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겨져 있다.
노 당선자는 또 "미국의 의견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마치 큰 일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자꾸 몰아붙이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국내 일각의 보수적 시각과 주장에 대해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미국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발언에 대해 미국보다 국내 일부에서 원체 민감하게 반응하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문제들에 매우 민감하게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한국이 답답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속내를 털어 놓았다.
노 당선자가 조각 등 새 정부의 인사 문제에 대해 밝힌 구상은 추천위 등 공식 시스템을 통한 철저한 검증으로 요약된다. 그는 이날 '각계의 인사 추천→추천위에서의 능력·가치지향 등 1차 검증→2차 도덕성 검증→3차 지역 안배 및 정치적 조정' 등 3단계를 제시했다. 개인적 인연을 통한 추천이라도 반드시 검증을 거치도록 해 정실·연고주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노 당선자는 "3차 안배·조정 단계는 나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하겠지만 1, 2단계에선 철저하게 공식적으로 검증하겠다"며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추천위에 접수시키겠다"고까지 말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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